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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술 때문에...

중앙선데이 2010.11.20 23:19 193호 10면 지면보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택시기사만 보면 죄송한 마음이 든다. 한때 파리의 택시운전사였던 홍세화 선생에게도 죄송하고, 현재 개인택시를 하는 해근이에게도 미안하다. 예전에 친구들과 어울려 밤늦게 해근이 신혼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해근이 부부는 철없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술상을 본다며 해근이 아내가 돈을 꺼낸 곳은 박남철과 박덕규의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라는 공동 시집이었다.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택시도 일종의 대중교통 수단일 텐데 나는 택시를 탈 때면 죄책감에 시달린다. 누가 묻지 않아도 나는 “약속 시간에 너무 늦어서”라거나 “몸이 안 좋아서”라는 변명을 굳이 기사에게 한다. 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미터기를 지켜본다. 택시 미터기는 시간이 돈이란 걸 가장 시각적으로 잘 보여 주는 사물이다. 어떤 미터기 안에는 달리는 말이 들어 있기도 했다. 그럴 경우 내 불안과 초조도 함께 말 달린다.

드물지만 죄책감도 불안도 없이 택시를 탈 때가 있다. 그건 술에 만취했을 때다. 그 무렵 나는 안양에 살고 있었다. 회사가 서울 강남에 있어 퇴근하면 사당에서 지하철을 버스로 갈아탔는데 마침 정류소 부근에는 어묵을 파는 술집이 있었다. 게다가 혼자 가도 반갑게 맞아 주는 주인 할머니의 인정이 흐뭇해 나는 딱 한 잔만 하고 싶은 유혹에 번번이 넘어갔다. 물론 한 잔은 대개 서너 잔이 되기 일쑤였다. 그날도 나는 딱 한 잔만 하려 했는데 그만 여러 잔을 마셨다. 짧은 시간에 대포의 포격을 받은 몸으로 나는 버스를 탔다. 창밖을 보는데 풍경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지더니 형태는 사라지고 색만 남는다. 어지러운 것 같아 나는 눈을 감는다. 내가 다시 눈을 뜬 것은 택시기사의 한숨 때문이었다.

“아니 자기 집을 모르면 어떡하라는 거야, 참.”
나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인상을 쓴다. 미간을 모으고 눈을 찡그린다. 여기는, 대체, 어디지? 이것은, 누구의, 삶인가? 나는 내가 아닌 것만 같다. 하늘의 달을 확인한다. 다행히 달은 하나다. 분명 사당에서 어묵과 대포를 먹고 버스를 탔는데 나는 택시에 앉아 있다. 죄책감도 불안도 없이.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을 겨우 일러 준다. 마침내 택시는 내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한다. 그제야 나는 미터기를 본다. 내 분수를 훨씬 뛰어넘는 숫자가 나의 죄의식을 후려친다. 죄의식은 기사에게 따진다. 내가 술 취해 잠든 것은 죄송하다. 그러나 요금이 너무 많이 나왔다. 원래 나는 버스를 탔다. 아마 버스에서 잠든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쳤겠지. 그래서 모처럼 택시를 탔겠지. 또 잠이 들었고 그러니 좀 돌았겠지. 그건 정말 죄송하다. 아무리 그래도 요금이 이렇게 많이 나올 수는 없다. 택시기사 당신이 나쁘다. 술 취한 승객이라고 일부러 빙빙 돌고는 이렇게 바가지를 씌우는 것은 나쁘다. 나는 요금을 치르면서 분한 눈으로 기사를 한참 노려본다. 끝내 한마디 해 주고 내린다. “아저씨, 그렇게 살지 마세요.”

내가 문을 쾅 하고 닫은 택시는 아직도 휘청거리는 나를 남겨 두고 사라진다. 혼자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데 그때야 비로소 기억이 살아난다. 버스 종점에서 버스기사가 깨운 것이, 거기서 택시를 탄 것이, 그러니까 터무니없는 요금이 아니라는 것이, 무엇보다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라는 사실이.




김상득씨는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일하고 있다. 스스로 우유부단하고 뒤끝 있는 성격이라 평한다. 웃음도 눈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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