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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그림은 말 없는 시, 시는 말하는 그림 …

중앙일보 2010.11.20 00:25 종합 28면 지면보기



조선 화가와 요즘 시인 짝 이룬 황홀경





황홀

임희숙 지음

스테디북, 312쪽

1만3000원




황홀(恍惚)은 빛이 어른어른해 눈이 부신 상태를 이른다. 사물에 마음이 팔려 멍한 상태를 말함이니 어지간히 매혹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단어다. 지은이 임희숙(52)씨를 황홀경으로 몰고 간 건 무엇일까. 그는 명지대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는 등단 20년차 시인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그림과 시에 사로잡힌 영혼의 고백이 펼쳐지리라 짐작할 수 있다.



 “‘시 안에 그림이 있고 그림 안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는 소동파가 당나라 시인이자 화가였던 왕유에게 한 말이다…자연스럽게 우리의 옛 그림과 현대시의 공감과 소통에 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조선시대 그림과 현대시의 경계를 허물어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가들의 삶과 사유를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몇 백 년 전 그림과 오늘의 시는 과연 통(通)할 것인가. 역시 시인은 시인이었다. ‘그림은 말없는 시며, 시는 말하는 그림’임을 여지없이 이끌어내고 있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그림 ‘세한도(歲寒圖)’와 정일근(1958~)의 시 ‘칼국수’가 어찌 연결될 것인가 싶지만 추운 세상을 지탱하는 칼국수는 “목구멍의 오래된 길을 씻어” 내리며 추사가 붓으로 그리지 못한 그림 속 기다림의 여백과 접속한다. 안견(1400년 경~?)의 ‘몽유도원도’는 이성복(1952~)의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3’과 가슴 저리는 떨림으로 무릉도원에 함께 도달한다. 겸재 정선(1676~1759)의 ‘금강전도’가 황지우(1952~)의 ‘길’과 조우하는 건 우리 마음 속 지도를 뒤적여 찾아낸 화엄(華嚴)의 일치란 점에서 극적이다. 김명국(1600~?)의 ‘달마도’와 김혜순(1955~)의 ‘딜레마’가 쌍둥이 혼이 되고,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과 최승자(1952~)의 ‘미망 혹은 비망·1’이 실존의 희망으로 겹친다.



 조선시대 화가 스무 명과 현대시인 스무 명이 짝을 이뤄 벌이는 이같은 황홀의 이중주는 그들을 맺어준 시인 겸 미술사연구자의 상상력으로 한층 더 신묘한 경지로 나아간다. ‘물렁물렁한 집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이보다 더 장할까.



정재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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