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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View 정명훈의 ‘음식 교향곡’] 아이들 점심시간을 바꾸고 싶다

중앙일보 2010.11.20 00:16 주말섹션 14면 지면보기








내 기억력은 굉장히 나쁘다. 내 바로 위인 바이올리니스트 경화 누나는 생후 6개월에 맡았던 냄새까지 기억하는 사람이다. 나의 기억력을 상대적으로 더 나빠 보이게 하는 누이다. 나는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한 직후 그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린 적도 있다. 10년 동안 함께한 프랑스의 오케스트라 단원 140명 중 40여 명의 이름밖에는 외우지 못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몇 개월 동안 배웠던 발레 동작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50여 년 전이다. 내가 여섯 살쯤 됐을 때다. 남자 아이에게 발레를 가르친 우리 어머니를 모두 이상한 눈으로 봤다. 그 때문에 발레 레슨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요즘도 아내는 집에서 동작을 좀 보여달라고 할 때가 있다. 아내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나는 몇 가지 기본동작을 취해준다. 나처럼 기억력이 나쁜 사람도 어렸을 때 배운 것만큼은 깊이 새겼던 모양이다.



# 지휘대에서 은퇴하면



 나이가 더 들면 지휘를 안 하거나 지금보다 훨씬 덜 하게 될 거다. 그때 뭘 할까 항상 생각한다. 나는 한국 어린아이들의 점심시간을 바꾸고 싶다. 한 시간이면 된다. 아이들에게 밥만 주는 게 아니라 예술과 문화를 주는 시간이다. 일단은 쿠킹 클래스를 연다. 하루에 한 반이 당번을 맡으면 어떨까. 서로 먹을거리를 만들어 주는 거다. 요리와 궂은일을 해보고 다른 이와 음식을 나눠 먹는 마음도 다독여준다. 때로는 다양한 나라의 음식을 맛보게 할 수도 있다. 외국의 음식문화와 식사예절을 체험해 보게 하는 것도 좋겠다.



 하루에 한 시간만 투자하면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다 요리를 할 수 있게 된다. 학교에서는 모두가 억눌려 일단 공부를 하고, 졸업하고 나면 그제야 일거리를 찾는 사이클을 멈출 수 있다.



 이 60분은 요리뿐 아니라 문화 전반을 배우는 시간이다. 요리하는 아이들에게 음악을 들려줄 수도 있고, 그림을 보여줄 수도 있다. 인생 전체에 걸쳐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예술을 선물해 주는 거다.



 나는 이 생각을 20년쯤 전에 우연히 시작했다. 파리에서 바스티유 오페라를 지휘할 때였다. 차를 운전해 주는 기사가 있었는데, 유난히 어린 아이였다. 당시에 스무 살쯤 됐을까. 특별히 부유한 집안 출신도 아니었고, 그저 평범하게 자라 직업을 선택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얘기를 나눠보면, 도대체 안 해본 게 없었다. 웬만한 악기도 다 다뤄봤고, 스포츠도 직접 다 해봤다. 학교만 착실히 다녀 졸업해도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었던 거다. 상당한 충격을 기억한다.



 일본은 또 어떤가. 몇 년 전 도쿄 필하모닉을 지휘했을 때의 일이다. 한 해의 시작을 함께 카운트다운하는 신년 음악회였다. 이런 공연은 연주자들도, 지휘자도, 청중도 모두 들뜬다. 음악회가 끝나고 근처 호텔에 연회장에 모두 모였다. 단원들은 미리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을 준비해 왔다. 비올라 주자들이 나와서 금관 빅밴드를 했다. 악장을 맡았던 바이올리니스트는 피아노를 쳤고, 다른 바이올린 주자는 노래를 기막히게 했다. 그토록 자주 만나 함께 연주했지만 이런 면들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노래 한번 시키려면 한참을 졸라야 하는 한국과는 또 다른 문화였다. 모든 것은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됐을 거다.



# 경험을 선물하는 점심시간



 우리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경험을 선물하는 데에 특별한 재능이 있으셨다. 뭐든지 일단 시켜보고, 적성에 맞는지를 지켜봤다. 우리가 하지 않겠다고 하면 가차없이 그만두게 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을 찾아줬다. 내가 음악과 요리라는 일평생의 관심 두 가지를 가지게 된 것도 어머니의 이런 선물 덕분이다.



 그랬는데도 아직 배우고 싶은 게 많다. 한 번은 아내와 뉴욕의 거리를 거닐다 ‘춤 공짜 레슨’이라고 써 있는 곳에 무작정 들어가기도 했다. 사방에 거울이 붙어 있는 방에서 왈츠를 추는 것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춤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졌다. 정원 손질하는 법도 배우고 싶다. 요리 또한 정식으로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으면 한다.



 이렇게 어른들 마음속에 아직 남아 있는 소망이 정답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걸, 지금 어린아이들에게 경험케 하면 된다. 아무리 입학 시험이 중요하고 성공이 급해도 밥은 먹어야 할 게 아닌가. 음식을 단지 먹는 것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더욱 즐거운 문화로 만들 수 있다. 뭐든지 많이 해보고 즐겨본 사람을 키우는 방법이다. 즐거운 점심 한 시간이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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