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곽재우, 그를 나 몰라라 한 조정

중앙일보 2010.11.16 20:08 종합 37면 지면보기


곽재우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예연(禮淵)서원. 대구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에 있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왜란 당시 가장 먼저 의병을 조직해 경상우도와 전라도를 지켜냈다. 일찍이 소설가 김성한은 곽재우를 ‘조선에서 가장 멋있게 살다간 인물’로 평가한 바 있다. [사진=문화재청 홈페이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조선 육군은 일본군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오랜 내전을 치르면서 싸움에는 이력이 난 데다 신무기 조총까지 갖고 있던 일본군 앞에 경상좌도는 유린됐다. “일본군은 귀신 같은 능력을 지녔다”는 소문까지 도는 와중에 그들이 낙동강을 건너 경상우도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해 끝내는 전라도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냈던 인물이 바로 곽재우(1552~1617)다.

 일개 서생의 신분에서 의병장이 되었던 곽재우가 커다란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유자(儒者)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사리(私利)를 탐하지 않는 진정한 헌신에 있었다. 당시 소문난 부자였던 곽재우는 전란 발생 직후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병력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갑자기 끌어 모은 의병으로 일본군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치고 빠지면서 유격전을 벌이는 한편 일본군을 두려워했던 ‘오합지졸’들의 겁부터 없애려고 부심했다.

 당시 전공을 평가하는 기준은 적의 머리(首級·수급)를 얼마나 많이 벴느냐에 달려 있었다. 곽재우는 여러 차례 승전을 거두었지만 전공을 과시하기 위해 수급을 탐하지 않았다. 『선조실록』에는 곽재우가 수급을 베는 대신 ‘적군의 배를 갈라 심장을 구워먹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왜 그렇게 했을까. 그것은 필시 당시 의병들이 일본군에 대해 품고 있던 공포심을 없애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일본군이 조총을 갖고 있고 용맹하지만 너희와 똑같이 오장육부를 지닌 인간이다’ ‘그들도 화살을 맞으면 죽는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 같은 통솔과 고락을 같이 하는 정성을 통해 의병들의 마음을 얻었다.

 곽재우의 전공은 날로 높아갔지만 그를 시기하는 재조(在朝) 신료들의 질시도 같이 높아졌다. 강직했던 곽재우 또한 그들과의 충돌을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군을 피해 도주했던 경상감사 김수(金<775F>)를 통렬히 비난하고 그를 처형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명군이 참전하고 전황이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자 의병을 대접하던 조정의 분위기는 시들해졌다. 위기가 지나가자 마음이 달라졌던 것이다. 선조는, 피란길에 자신의 말고삐를 잡았던 노복들까지 공신으로 삼았지만 경상우도와 전라도를 지켜낸 곽재우는 공신이 되지 못했다.

 곽재우는 왜란이 끝나자 휘하 병력을 해산하고 은거에 들어간다. 곡기까지 끊고 도인(道人) 행세를 했다.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곽재우는 자발적으로 헌신했지만 국가는 그를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