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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12) 자린고비 이승만 대통령

중앙일보 2010.11.16 00:31 종합 10면 지면보기



이승만 “군인이 돈맛 알면 안 돼 … 돈 밝히면 나라가 망해”



1950년 9월 경남 진주에서 한 한국 소년이 미군 전투식량인 C레이션 박스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당시 웬만한 국군 장교의 월급으로는 암시장에서 C레이션 한 박스를 사기 어려울 정도였다. 작가 박도씨가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의 자료를 정리해 제공한 사진이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많은 일을 건의했다. 장군 승진 인사를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과 관련한 핵심적인 사안의 개선 방안을 많이 상신했다. 대통령은 그런 나의 건의를 대부분 받아주는 편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대통령이 가장 신경을 쓰는 일 중 하나가 대한민국 군대를 하루빨리 제 궤도에 올려 단독으로 적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었다.



 그 때문인지 이 대통령은 국군의 실력 증강을 위한 방안에는 대부분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해주곤 했다. 그러나 아주 가끔 내가 올린 건의안이 대통령의 승낙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돈과 관련된 사안이 특히 그랬다.



 대통령은 매우 검소한 생활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누구든지 경무대에 들어가 대통령과 아주 잘 차려진 식사를 함께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설령 함께 식사를 하더라도 쌀밥에 나물 반찬 몇 가지, 생선이나 고기 반찬 한두 점으로 차린 아주 소박한 밥상을 나누는 정도였다.



 누군가와 환담을 하는 경우라도 대통령은 대개 간단한 과자 한 접시에 커피나 차 한 잔을 대접했다. 그 이상은 누구라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런 부분에서 대통령의 태도는 매우 엄격했고 절도가 있다는 인상을 줬다.



 그는 해외에 나가는 공직자들이 사용하는 달러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했다. ‘공직자가 나라의 돈을 함부로 쓸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달러 결제는 상당히 지독할 정도였다. 공직자 지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해외에 나가는 사람의 경비를 살피는 대통령의 기준은 ‘10달러’였다. 이 기준을 넘어서는 금액에 대해선 대통령은 그 해외 출장자의 경비를 샅샅이 살폈다. 조금 이상한 구석이라도 있는 경우라면 결재를 하지 않고 다시 검토하도록 서류를 되돌려 보내기 일쑤였다. 당시에는 외국에 출장 나가는 공무원이 매우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설령 해외에 나가더라도 풍족한 경비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대통령은 공직자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모범을 보여 줘야 한다는 점, 전쟁을 겪고 있는 나라의 살림이 말이 아닌데 공직자들이 돈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모든 경비 지출을 엄격하게 단속하는 편이었다.



 그런 이 대통령에게 나는 국군 장교들의 생활 처우 개선안을 올린 적이 있었다. 제주도 모슬포 훈련소와 논산 훈련소의 문제를 해결한 직후였다. 당시 장교는 계급이 장교일 뿐이지 생활 자체는 아주 형편없었다. 당시 소령에서 대령까지의 영관 장교 월급은 가족들이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살 정도에도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미군이 전시 식품으로 사용하고 있던 C레이션 한 박스 값은 암시장에서 1만원 정도였지만, 소령이나 중령의 월급이 C레이션 한 박스 가격도 안 되는 정도였다. 적과 맞서 싸우는 일을 천직(天職)으로 알고 살아가는 장교들의 생활은 따라서 상당히 어려웠다.



 ‘후생(厚生) 사업’이라는 게 그래서 유행하곤 했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장교들이 ‘돈 되는 곳’에 눈을 돌리는 일이었다. 바깥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돈벌이 궁리에 빠지거나, 사병들이 먹는 음식이나 부대에서 사용하는 유류(油類) 등 보급물자를 직접 건드려 빼돌리는 일도 생기게 마련이었다. 그런 직접적인 비리가 아니어도 부대의 물건을 사용해 돈벌이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게 부대 차량을 이용하는 운수사업이었다. 내가 육군참모총장에 부임한 직후에는 동해안에서 명태를 가득 싣고 길을 지나던 국군 트럭이 열차와 충돌해 큰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국군의 물자 수송을 위해 길을 다녀야 할 군용 트럭이 동해안 명태를 운반해 주고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이다가 벌어진 사고였다. 후생사업을 벌이다가 발생한 사고는 그 뒤로도 자주 이어졌다.



 나는 어느 날 이 대통령에게 달리 보고할 안건이 있어 경무대를 방문했다가 슬그머니 국군 장교 처우 개선안을 꺼내들었다. 대통령의 의중을 떠보는 것이 먼저 중요하다고 생각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각하, 우리 국군 장교들의 생활이 너무 어렵습니다. 봉급이 너무 적어서 그렇습니다. 가족을 부양하는 데 돈이 많이 부족한 편입니다. 개선이 필요합니다.” 나는 완곡하게 말을 마쳤다. 그러나 돌아온 대통령의 대답은 아주 단호하면서도 차가웠다.



 “군인이 돈맛을 알면 안 돼. 군인이 돈을 좋아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야. 군인은 ‘발런티어’로 봉사하는 자세를 지녀야 해.” 나는 더 이상 말을 되받을 수 없었다. 대통령 자신이 그렇게 돈을 멀리했기 때문이었다.



 ‘생일 자개상 사건’은 이 대통령의 그런 면모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1953년 봄이었다. 대통령의 생일이 되자 경무대에서 작은 파티가 열렸다. 백두진 국무총리와 장관들, 육해공 참모총장들이 참석했다. 백 총리가 국무위원 일동의 이름으로 자개상 하나를 선물로 대통령에게 건넸다.



 그러나 대통령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생일 선물을 받아드는 고맙거나 기쁜 표정은 특히 아니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내 생일을 축하해 주는 것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선물을 받으면 서울 장안의 귀한 물건들이 다 경무대로 모일 것입니다. 이번만은 선의로 생각해 자개상을 받겠지만 앞으로는 절대 이러지 마시오.”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우리는 경무대에서 내놓은 국수 한 그릇만 얼른 먹고 자리를 빠져나오고 말았다. 나는 업무를 위해 자주 대통령이 머물던 경무대를 방문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경무대를 방문할 때마다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던 대통령의 생활은 검소함 그 자체였다. 스스로 모범을 보였던 대통령이어서 군대 장교들에게 ‘봉사자로서의 정신’을 강조하는 면모가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런 이 대통령의 성품 때문에 나는 국군 장교 처우 개선안을 다시 언급조차 할 수 없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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