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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 칼럼] 감사의 조건

중앙일보 2010.11.16 00:01 종합 39면 지면보기






문창극
대기자




세종로, 남산길 가로등에 걸어놓은 꽃바구니들이 비닐포장을 쓰고 손님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란 은행잎은 이제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듯 한 잎 두 잎 떨어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서울의 가을을 보여주고 싶었다. 달라진 이 나라의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다. 비가 오면 안 될 텐데… 바람이 불거나 기온이 내려가면 안 될 텐데…. 내 마음이 이럴 때 하물며 행사를 직접 준비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다행히 우리는 날씨 복을 누렸다. 감사했다. 이번 G20 서울회의의 결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내년 프랑스 칸 회의로 주요 결정이 미루어졌기 때문에 미흡하다고 하는 측과 그 정도면 훌륭했다는 측으로 나뉜다. 그러나 그것이 주최국의 책임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올림픽이나 운동경기 때는 쉽게 감격하며 잠시나마 애국심을 느낀다. 그러나 정치가 결부되면 금방 마음 문을 닫는다. 반대하는 쪽은 무조건 깎아내리려 한다. 이번 일은 그런 정치가 아니었다. 여야, 지역, 빈부를 떠나 모두 긍지를 가질 만한 ‘우리의 일’이었다.



 감사할 일이 어찌 날씨뿐이겠는가.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선진국 중심의 G7 체제로는 위기극복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흥국을 포함시켜 새 체제로 만든 것이 G20 정상회의다. 여기에 어느 나라를 포함시킬 것이냐는 선진국 마음대로였다. 물론 인구, 국내총생산, 지역대표성 등을 고려했을 것이다. 한국은 경제력으로 15위권에 드는 나라이니 우리로서는 당연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인구와 국내총생산으로 볼 때 스페인·나이지리아·북구연합 등은 자격을 가졌는데도 제외됐다. 동북아에서는 한·중·일 모두가 참여했다. 지역적으로 편중됐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한국이 참여한 데는 당시 부시 미 행정부의 덕도 컸다. 이 회의는 임시기구로 출발했으나 이제 세계 경제문제를 다루는 가장 권위 있는 항구적인 기구로 자리잡았다. 여기에 우리가 포함된 것이 감사하지 않은가. 과거처럼 문틈으로 귀동냥하는 신세가 됐다면 우리는 환율·무역 전쟁에서 그들이 결정해주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의장국이 되기는 쉬운가? G7국이 아닌 신흥국에서는 우리가 처음이다. 의장국은 명목상 사회만 보는 것이 아니다. 사전 조율 등 모든 진행에 책임을 진다. 장관·차관·실무자 등 각 단계의 회의에서도 우리가 의장이 되었다. 의장국은 회원국에 모든 자료를 요청할 수 있다. 실무진들은 의장국의 파워에 놀랐다고 했다. 우리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들이다. G20 회원국이라고 하지만 처지가 모두 달랐다. 환율 자유국 대 통제국, 무역 흑자국 대 적자국, 민주국가 대 독재국가, 식민 종주국 대 피식민지국 등 그 입장 차이로 갈등의 소지가 많았다. 절묘하게도 한국은 여러 면에서 이를 중재할 수 있는 적절한 위치에 있었다. 식민지 시대와 전쟁의 불행을 겪고도 모범적인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루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흠잡기 어려운 반듯한 나라가 되어 있었다. 그 덕에 의장국이 된 것이다.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은가.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의 과거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때는 이 처지를 한탄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와서 돌아보면 그 지정학적 질곡이 오히려 축복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남북분단과 6·25는 불행이었지만 미국과의 인연으로 인해 살아남았고 번영할 수 있었다. 일본은 이웃인 우리를 식민지로 삼았다. 그러나 이웃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모델로 우리는 공업화를 할 수 있었다. 중국의 변방이었던 우리는 그들에게 억눌리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공산주의를 택하고 문화혁명으로 세월을 낭비하는 동안 우리가 먼저 발전했다. 그 덕분에 지난 몇십 년 동안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제는 중국의 성장과 더불어 우리 경제가 커지고 있다. 분명히 불행했던 과거였는데 그것이 복이 된 것이다. 우리의 현재가 지나간 과거를 변화시킨 것이다.



 한 외국 신문은 “한국인들만 변화된 자기 나라의 위상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동안 우리는 살아남기에 급급했다. 그런 현실인식이 우리를 각박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그런 중압감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는 여름 동안 열심히 일한 농부다. 우리가 심은 벼는 이제 나락이 패었고 영글기만 하면 된다. 가을 햇볕만 좋으면 추수를 할 수 있다. 바라는 미래가 분명히 온다는 믿음을 가질 때 현재를 사는 우리는 힘을 얻게 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현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국격(國格)에 대해 말한다. 품격이 있는 나라를 원한다. 그 품격은 어디서 나오는가? 감사를 느끼며 사는 사람들은 몸가짐이 다르다. 그 마음이 너그러워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너그러움이다. 핏발 선 눈에서, 불만이 가득 찬 마음에서, 약한 자를 무시하는 거만함에서는 관용이 나올 수 없다. G20 회의는 복 받은 행사였다. 받은 복을 감사할 줄 알 때 또 다른 기적은 오게 되어 있다. 그것이 인간사의 법칙이다. 선진국이란 미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감사함 속에 있는 것이다.



문창극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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