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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셋방살이 설움’은 언제 시작됐을까

중앙일보 2010.11.09 00:11 종합 37면 지면보기


1971년 서울 청계천변의 판자촌. 한국전쟁 이후 서울 인구가 급팽창하면서 변두리는 어느 곳이나 무허가 판잣집들로 가득 찼지만, 이런 집들조차 식구 단위의 ‘안돈(安頓)’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파트가 일반화하기까지 서울의 주택들은 대개 ‘주인집’과 ‘세들어사는 집’의 두 식구 또는 그 이상의 식구들에 의해 분할 이용됐다. [사진출처 : 『‘71 서울』]

1908년 9월, 한성부는 ‘세거(貰居)규칙’을 반포하여 가옥주가 집을 팔 경우 미리 세입자에게 통지하도록 했다. 집주인이 세입자 모르게 집을 팔아 치워 세입자를 당혹하게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규칙은 러일전쟁 이후 서울에 밀려들어온 일본인 세입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임차인 보호를 규정한 우리나라 최초의 법률이다.

 조선시대에도 서울에서는 돈을 내고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주택 임대차도 정상적인 거래 관계였기에, 세입자들이 특별한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았다. 다만 집주인이 세입자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아무 때나 나가라고 할 때 불쾌감이나 억울함을 느끼기는 했을 터이다. 그런데 ‘셋집’이 아니라 ‘셋방’일 때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본래 ‘식구(食口)’란 한집에 함께 살며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가족과는 다른 뜻이다. 거느린 노비는 한 식구지만, 남의 집에 양자 간 친아들은 다른 집 식구다. 집은 식구 단위의 주거 공간이다. 옛날에는 제집에 모르는 행인을 유숙(留宿)시킬지언정, 다른 식구들과 집을 나눠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1910년대 중반께부터 도시에서는 집의 일부 또는 방 하나를 다른 식구들에게 빌려주는 일이 나타났고, 곧 엄청난 속도로 늘어났다.

 노비들이 떠나 버려 행랑채가 빈 부잣집들에서는 남의 식구들을 불러들여 노비가 하던 일을 맡겼다. 행랑아범이나 행랑어멈은 종은 아니었으나 언제라도 ‘주인집’에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노동력보다 돈이 더 절실했던 집에서는 돈을 받고 방을 내주었지만, ‘행랑살이’와 ‘셋방살이’ 사이의 거리는 아주 짧았다. 1925년 8월, 서울 돈의동에서 셋방살이 하던 임신 6개월 된 젊은 여성이 갑자기 죽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여성이 월세를 제때 못내 집주인에게 매 맞는 것을 보았으며, 그 때문에 죽었을 것이라고 경찰에 고발했다. 행랑과 셋방이 연속된 탓에 ‘셋방살이’하는 사람을 종 대하듯 하는 태도는 쉬 바뀌지 않았다.

 셋방살이하는 가장과 주부의 ‘죄의식’도 무척 깊었다. 셋방에 사는 사람들은 밤에 부부싸움도 함부로 할 수 없었고, 자기 아이들이 주인집 아이들과 싸우거나 더 좋은 성적표를 받아오더라도 전전긍긍해야 했다. 셋방살이를 식구들에게 ‘죄짓는 일’로 보는 태도는 주택 소유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다. 오늘날까지도 집의 소유 여부는 일차적인 계층구분선이 돼 있지만, 꼭 자기 집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많이 약해졌다. ‘셋방살이 설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진 것도 한 가지 원인일 것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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