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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헤이그에서 서울까지

중앙일보 2010.11.09 00:08 종합 39면 지면보기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대한제국의 대쪽 검사였던 이준이 고종의 밀서를 품고 이상설·이위종과 함께 만국평화회의로 떠났던 특사사건을 우리는 기억한다. 제국열강의 잔치에 그들은 불청객이었다. 상전들의 모임에 식민지 백성에겐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문전박대의 분을 참지 못해 이준이 헤이그에 뼈를 묻었던 것은 1907년, 지금부터 103년 전 일이다. 제국들의 영토 전쟁을 평화롭게 추진하고자 모였던 그 ‘평화회의’에서 대한제국은 맛있는 케이크 조각이었을 뿐이다.



 20세기 초, 제국열강의 최대 관심사는 영토 분할에 있었다. 산업 경쟁력과 시장 확보에 영토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는데, 영토 분할은 항상 불균형적이었다. 영토 분할의 이 ‘글로벌 불균형’(global imbalance)에 불만을 품고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일어섰다가 미국·영국·러시아에 혼쭐이 나 주저앉았다. 세계대전을 혹독하게 치른 지구촌을 다시 엄습한 것은 총성 없는 전쟁인 경제전. 여기에서 새로운 형태의 글로벌 불균형이 태어나 세계를 긴장시켰다. 빈국과 부국의 격차, 흑자국과 만성 적자국의 공존, 수시로 널뛰는 환율, 그리고 언제 다시 울타리를 뛰쳐나올지 모를 탐욕의 금융자본. 2008년 가을 우리는 월스트리트에서 발생한 금융사고가 세계경제를 불구덩이 속에 쑤셔 넣는다는 섬뜩한 사실을 체험했다.



 G20정상회의의 존재 이유가 이것이다. 글로벌 불균형에 내재된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통제하고 국제통화 공조체제를 구축하는 열강들의 모임, 여기에 한국이 의장국으로 나섰다. 세계 GDP의 85%를 생산하는 선진 20개국 정상들이 1만여 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서울로 날아오는 데에 거의 한 세기가 걸렸다. 헤이그 회의에서 문전박대당했던 나라가 주인 행세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감개무량하거니와, 세계의 통화체제와 금융질서를 총괄하던 ‘브레턴우즈 체제’의 21세기적 수정안을 탄생시킬 예정이고 보면 비장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한국의 약진 외에 한 세기 동안 글로벌 불균형의 본질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문명사적 사실을 깨닫는 것은 조금 서글프다. 만국평화회의의 쟁점이 영토 불균형이었다면, 서울 정상회의의 주제는 경제 불균형이다. 인류는 불균형의 해소 방법으로 흔히 전쟁을 택한다. 19세기 동안 국제전 형태의 영토전쟁은 103번 일어났던 반면, 문명 개화가 활짝 피었던 20세기에는 84번 국제전이 발생했다. 그것도 19세기의 것을 다 포함해도 모자랄 전면전을 두 차례나 치렀다. 영토 불균형을 조절하는 지렛대는 군비축소였는데, 경제전의 지렛대는 환율이다. 1944년 뉴햄프셔의 작은 마을 브레턴우즈(Bretton Woods)에서 강대국들이 달러를 세계의 기축통화로 채택한 이후 국제통화와 교역질서가 잡혔고 국제전은 비로소 잦아들었다.



 환율은 경제력을 나타내는 지표이자 생산과 소비를 결정하는 뇌관이다. 수출국에는 더욱 그렇다. 환율 상승은 수출 경쟁력과 경기에 치명타를 입힌다. 미국이 흑자국이던 시절에는 브레턴우즈 체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1971년 이후 현재까지 미국이 적자의 늪에 허덕이자 국제통화질서가 교란되기 시작했다. 원자재와 유가가 급등했고, 강대국들이 자국 화폐의 절상 압력에 몰렸다. 화폐가치 절상은 수출국에는 독약이다. 세계의 공장으로 일어선 중국이 버티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미국에는 농민 2억 명이 산업전사로 속속 편입되는 중국에 무한히 환율을 양보할 수 없다. 20세기 초, 영토분쟁을 군사력 통제로 다스리려 했듯이, 환율 통제로 산업 경쟁력을 조정하려는 것이 지금 강대국들의 최대 관심사다. 군비 경쟁이 환율전쟁으로 전환한 배경이자, 서울회의가 환율에 집착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지난 2500년 인류 역사에서 10개의 화폐가 기축통화의 구실을 했다가 사라졌다. 현재 약세를 면치 못하는 달러화도 언젠가 기축통화의 독점적 지위를 상실할 것이다. 금융자본이 전 지구를 휘감고 있는 오늘날 기축통화의 소멸은 마치 화산 폭발과 같은 막대한 손실과 비용을 요구한다. 그 충격파는 아마 1929년 대공황의 몇 곱절은 될 것이다. ‘21세기 대공황’이 ‘경상수지 폭을 ±4%로 제한하자’는 서울 안(案)으로 해소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기축통화의 유효성을 연장하는 데는 기여할 것이다. 그것은 미국 중심 질서의 연장을 의미한다. 달러화의 인위적 보호와 미국 주도 세계 거버넌스에 대한 반발 확산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된다.



 백 년 전 대한제국의 특사들을 내쳤던 그 강대국들이 대한민국의 초청장을 쥐고 바쁜 걸음으로 입경한다. 헤이그에서 그들의 선조들이 세계지도를 지참했다면 서울에는 환율지도를 품고 온다. 의장국 한국이 문명사적 비극을 혹독하게 치른 국가이자, 식민지에서 올라선 유일한 강국이란 냉엄한 사실을 그들이 인식하기만 한다면, 환율전쟁을 넘어서 약소국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까지 의제를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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