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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개혁 반대편에 선 임금, 동학 막으려다 외세 침탈 자초

중앙선데이 2010.11.08 13:32 191호 28면 지면보기
전봉준 압송장면 서울로 끌려온 전봉준은 일본의 회유를 거부하고 사형당했다.
개국군주 망국군주 고종⑦ 동학농민혁명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경상도 영천의 역술가 정환덕(鄭煥悳•1857~1944)은 광무 6년(1902)부터 시종원 시종으로 고종을 가까이에서 모셨다. 그는 남가몽(南柯夢) 에서 고종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불면증에 시달려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고종은 놀기를 좋아하여 친정 이후 매일 밤이 되면 잔치를 베풀고 음란한 생활을 하였다”며 밤낮이 바뀐 이유가 노는 습성 때문이라고 달리 전한다. 황현은 고종 부부의 야간 연회에 대한 승지 이최승(李最承)의 목격담을 전해준다. 밤중에 풍악소리가 들려 가보니 양전(兩殿•고종과 민비)이 평복 차림으로 전각 위에 앉아있고 그 아래 수십 명이 놀면서 ‘오는 길 가는 길에 만난 정 깊이 들어 죽으면 죽었지 헤어지지 못한다’는 음란한 노래를 부르는데 명성황후는 무릎을 치며 ‘그렇지’ 하고 좋아했다는것이다.

사발통문 전봉준이 각 마을 집강에게 보낸 사발통문인데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이라고 쓰여 있다. 사진가 권태균
황현은 “양전(兩殿)이 하루에 천금을 소모하여…(친정) 1년도 안 되어 대원군이 10년 동안 쌓아 둔 저축미가 다 동이 났다. 이로부터 매관매직(賣官賣職)의 폐단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며 “명성황후는 수령 자리를 팔기로 마음먹고 민규호(閔奎鎬)에게 그 정가(定價)를 적어 올리도록 했다”고 전한다. 돈 주고 벼슬을 산 자들은 착취에 열심일 수밖에 없었고, 황현은 “백성들은 더욱 난리가 일어나기를 바라서 한 사람이 분개해 소리를 지르면 따르는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전하고 있다. 이렇게 세도정치와 부패정치에 분개한 백성들이 변하고 있었다.

고종 즉위년(1863) 12월 선전관(宣傳官)정운귀(鄭雲龜)가 “조령(鳥嶺)에서 경주까지…어느 하루도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주막집 여인과 산골 아이들까지 그 글을 외우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고종실록 즉위년 12월 20일)”라고 보고한 대로 삼남지방에 동학이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었다. 동학교주 최제우(崔濟愚)는 고종 1년(1864) 체포된 후 “처음 그 공부를 시작할 때 몸이 떨리면서 귀신을 접했다”고 말했으나 백성들은 종교적 체험보다는 사회변혁을 바라고 동학에 입도(入道)했다. 최제우는 동경대전(東經大全) 「논학문(論學文)」에서 “내 도는 이 땅에서 받았으며 이 땅에서 펼 것이니 어찌 서학(西學)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조정은 고종 1년(1864) 3월 그를 “서양의 술법(西洋之術)을 답습한다”는 정반대의 명목으로 목을 벴다.

황토현 전적지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곳이다. 전북 정읍시 덕천면에 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사람이 본래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人是天 事人如天)”면서 ‘자신은 비록 부인이나 어린아이라도 스승으로 모신다’고 말해 사대부 지배체제를 부인했다. 백성들은 더 이상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체제를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종 29년(1892)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전개한 ‘교조 신원(伸寃)운동’은 단순한 종교 자유 획득 운동이 아니었다. 고종 29년(1892) 12월의 전라도 삼례 집회와 이듬해(1893) 2월의 광화문 복합상소에서는 교조신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해 3월의 충청도보은 집회에서는 교조신원 요구가 사라지고대신 “왜양(倭洋)을 소파(掃破•깨끗이 부숨)하여 대의(大義)를 이루고자 한다”고 천명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각성했으나 조대비의 인척인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 불효(不孝)•불목(不睦) 등의 명목으로 재물을 빼앗고 만석보(萬石洑) 수세(水稅)를 강징(强徵)한 것처럼 지배층에게 백성들은 여전히 착취 대상이었다.

이 양자의 의식 차이가 충돌한 것이 동학농민혁명이었다. 전봉준(全琫準)은 고종 30년(1893) 11월 조병갑에게 두 차례 수세 경감요구를 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는 각 마을 집강(執綱)에게 보내는 사발통문(沙鉢通文)에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京師•서울)로 바로 향할 것’이라고 썼다. 이미 ‘서울 진격’을 공언하는 상황에서 수세(水稅) 문제는 곁가지에 불과했다. 고종 31년(1894) 1월동학농민군이 고부관아를 습격하자 크게 놀란 고종은 조병갑을 파면하고 박원명(朴源明)을 대신 임명했다. 그러면서 고종은 농민들의 요구인 폐정 개혁 대신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를 파견했다. 이용태는“그 무리가 많은 것을 꺼려서 병을 칭탁하고 머뭇거리다가 도리어 기회를 타서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니 민심이 더욱 격화되었다(고종실록 31년 2월 15일 )”는 기록처럼 사태를 악화시켰다.

그해 3월 다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蒼生•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함이다”라고 선언했다. 전봉준은 사발통문에서 공언한 대로 4월 7일 전주성을 함락시켰으나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에게 정부가 폐정 개혁을 단행한다면 해산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해 5월 8일 정부와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이 맺어지자 농민들은 전주성에서 나와 호남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을 추진했다.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東學史:1940)에는 12개 조의 폐정 개혁안이 실려 있는데 그중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을 징계할 것, 노비문서는 불태울 것, 토지는 평균하게 나누어 경작하게 할 것’ 등의 조항이 있다. 신분제 해체는 갑신정변 직후 ‘인민평등의 권리’를 규정한 개혁정강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이미 1년 전의 보은 집회 당시 “청나라 군사를 사용하는 것은 가하다(淸兵可用, 승정원일기 고종 30년 3월 25일)”며 청군을 불러 진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농민들이 주장하는 폐정 개혁은 민씨 척족정권의 몰락을 의미했기에 척족의 대표 민영준(閔泳駿•뒤에 영휘로 개명)은 청군 차병(借兵)을 적극 주장했다. 양호초토사 홍계훈도 전주화약 20여 일 전인 4월 19일 청군의 파병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렸다.
전주화약 자체가 서울 진공을 저지하려는 시간 벌기에 지나지 않았다. 갑신정변 이후 맺은 천진조약에 따라 청군의 파병은 일본군의 파병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안팎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에 해외 출병은 난제를 해결할 마법의 카드였다.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는 조선 주재 임시 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衫村濬)를 시켜 청의 원세개(袁世凱)에게 ‘청군이 파병해도 일본은 파병할생각이 없다’고 전하게 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동비(東匪•동학)가 홍계훈에게 보낸 글에 ‘국태공(國太公•대원군)을 받들어 모실 것’이란 구절이 있자 양전(고종과 민비)이 크게 노해 동비를 속히 평정하지 않으면 점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청나라에 원병을 청했다’고 전하고 있다. 대원군 집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청군 파병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청군이 파병되자 일본도 즉각 파병했다.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는 6월 21일 일본군 2개 대대를 이끌고 경복궁에 난입했는데, 고종실록은 “시위군이 발포하며 저지하자 임금이 중지하라고 명했다”고 전하고 있다. 매천야록은 오토리 공사가‘고종을 협박하여 함부로 요동(搖動)하는 자는 머리를 벤다는 교지를 내리게 하자 병사들이 모두 통곡하면서 총과 군복을 찢은 후 도주했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이 조선군의 무장을 해체시킨 셈이었다.

이날 오토리는 고종에게 “국태공이 아니면 오늘날 인주(人主)가 되지 못했을 것이니속히 국태공을 데려오라”고 요구했고 쇄국론자 대원군은 일본의 힘으로 세 번째 정권을 잡았다. 대원군 집권이 두려워 청군 파병을 요청한 것이 대원군이 집권하는 역설로 나타났다. 고종이 호위군사들에게 일본군과 맞서면 목을 베겠다는 교지를 내린 상황에서 민씨 척족들은 도주했지만, 일본에 맞서 봉기한 것은 동학농민군이었다. 그해 9월 양호창의영수(兩湖倡義領袖) 전봉준은 충청도관찰사 박제순(朴齊純)에게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 우리 임금님을 핍박하고 우리 국민을 어지럽게 하는 것을 어찌 그대로 참을수 있겠는가?”라면서 동참을 요구했다. 그러나 훗날 을사오적(乙巳五賊)이 되는 박제순은 ‘비적(匪賊)이 날뛰고 있다’고 보고했고 고종과 의정부는 순무사(巡撫使) 신정희(申正熙)를 보내 일본군과 함께 농민들을 진압하게 했다. 그해 10월 동학농민군 주력은 충청도 공주의 우금치(牛禁峙) 전투에서 패전했고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잠입해 재기를 모색하던 전봉준은 그해 12월 말께 체포돼 이듬해(1895) 4월 손화중•김덕명 등과 함께 사형당했다.

위로부터의 개혁인 갑신정변이 진압된 지 10년 만에 아래로부터의 개혁인 동학농민혁명도 진압되었다. 결정적 순간에는 항상 개혁의 반대편에 섰던 고종의 행태는 이번에도 반복되었고, 개혁 희구 민중세력도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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