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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목초지, 돈·권력 모이는 ‘대한민국 심장’ 으로

중앙선데이 2010.10.31 03:20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사색이 머무는 공간 <48> 서울 여의도 공원







한강의 기적의 발상지인 여의도는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가을색이 짙어 가고 있는 여의도 공원 숲에는 다양한 생명들이 자라고 있고, 공원 동쪽에는 국제금융센터 등 고층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신동연 기자



여의도는 바람이 세다. 북서쪽 국회의사당은 서해에서 강을 타고 불어오는 드센 바람을 탄다. 정반대 편인 남동쪽 63빌딩은 황포 돛을 닮았다. 그 옛날 마포나루에 드나들던 경강상인들은 바람과 돛을 이용해 물길을 오르내렸다. 여의도 형국은 배와 흡사하다. 북쪽 한강과 남쪽 샛강 사이에서 진수하는 배는 만선(滿船)의 풍요와 여유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단풍이 물들어가는 가을 한낮, 여의도 공원 ‘문화의 마당’에 서면 각종 금융회사 건물들이 빌딩숲을 이룬다. 증권회사와 은행 본점은 물론 전경련회관, 금융감독원도 여의도에 자리 잡고 있다.



흔히 여의도를 허드슨 강과 이스트 강에 둘러싸인 뉴욕의 맨해튼과 비교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여의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보다 훨씬 크다. 국회의사당, 언론사는 물론 세계적인 규모의 순복음교회까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대통령 취임식까지 한다. 금융기관이 밀집한 동쪽에는 돈, 국회의사당과 정당들이 있는 여의도 서쪽에는 권력이 몰린다. 여의도는 명실상부하게 돈과 권력이 공존하는 섬이다.



여의도의 지리적인 중심은 국회대로와도 접한 여의도 공원이다. 마포대교와 서울교의 연장선 위에 놓인 공원은 ▶자연생태의 숲 ▶문화의 마당 ▶잔디마당 ▶한국전통의 숲으로 구성된 명소다. 아침저녁에는 운동 나온 주민들, 점심 때는 산책 나온 직장인들의 발길이 잦다. 많을 때는 하루 5만 명가량의 시민들이 공원을 찾는다. 올림픽대로와 원효·마포·서강대교는 물론 지하철과 유람선까지 있어 교통도 편리하다.



‘문화의 마당’ 50m 높이의 창공에서 태극기가 펄럭인다. 가로 12m, 세로 8m의 대형 태극기는 현재 우리나라에 게양된 것 가운데 가장 크다. 그래서 공원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드센 강(江) 바람을 맞는 태극기는 때도 많이 타고 곧잘 찢어지기도 한다. 공원관리사무소에서는 해마다 7~8 차례 태극기를 새로 바꿔 단다. 비용도 만만찮지만 관리도 쉽지 않다. 생태 숲과 산책로가 중심인 공원에 왜 초대형 태극기를 달아 놓았을까.















89년 교황 방문 때 천주교 100만 신도 운집



나부끼는 태극기를 쳐다보노라면 100만 군중의 함성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그렇다. 이곳은 오랫동안 광장이었다. 1971년 9월, 너비 280~315m, 길이 1350m, 39.9ha(11만4300평)의 5·16광장이 들어섰다. 여의도 광장은 나중에 바뀐 이름이다. 국군의 날 퍼레이드도 여기서 했고 국풍행사, 대통령 선거 유세, 종교행사는 물론이고 각종 대규모 시위도 이곳에서 치러졌다. 87년 대통령 선거 때는 노태우·김영삼·김대중 후보가 저마다 100만 넘는 청중을 동원해 진귀한 ‘숫자전쟁’을 벌였다. 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재한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 때도 100만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운집했다. 이렇듯 여의도 광장은 이 땅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환호하고 성토하고 기도하던 현장이다. 이제 광장의 흔적은 대형 태극기 게양대와 야외무대 사이로 움츠러든 아담한 ‘문화의 마당’에서 가까스로 찾아볼 수 있다. 공원 외곽으로 난 2.4㎞ 자전거 도로를 달려본다. 그렇지만 90년대 중반까지 한눈에 가슴을 파고들던 드넓은 광장의 장쾌함을 맛볼 수 없다. 대신 공원 숲과 산책로에서 계절의 빛과 숲의 소리에 고즈넉이 침잠하며 나를 돌아보는 여유로움을 만난다.



여의도(汝矣島)는 ‘너의 섬’의 한자 표기다. 한강 모래톱과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이 하중도(河中島)는 거의 쓸모가 없었던 모양이다. 지금의 신길역 주변의 ‘방학호진 나루터’와 한강성심병원 건너편의 ‘영등포 나루터’로 건너다니며 뽕나무를 가꾸고 소나 말을 방목하던 섬이었는데, 홍수가 나면 저지대가 범람하곤 했다. 1933년 말, 여의도와 밤섬을 합친 여율리의 호구 수는 일본인 1호 4인, 한국인 101호 608인으로 총 612인이 전부였다. (경성부 행정구역확장 조사서) 국회의사당 자리에는 양말산이 있었는데 어원은 말을 기르던 양마산(養馬山)이다. 조선조 때 궁녀들의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여서 국회 건물에 바람 잘 날 없다는 호사가들의 소문도 있다. 하지만 문헌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1916년 일제는 양말산 남쪽자락과 지금의 여의도 공원 자리의 초지에 중국 대륙과 만주 진출을 위한 비행장을 닦는다. 그 비행장에 1917년 봄 미국인 조종사 ‘아트 스미스’가 곡예비행을 한다. 1920년 5월에는 로마에서 도쿄로 비행하던 공군 중위 ‘후에란이’와 ‘마세로’가 착륙한다. 여의도는 물론 인근 노량진·마포 일대에 몰려든 군중들이 만세를 불러 환호했다.



그러나 더 큰 감격시대는 1922년 12월 10일에 열린다. 한국인 최초로 조국의 하늘을 비행했던 안창남(安昌男·1900~1930)은 일제강점기 온 겨레의 가슴을 후련하게 만들었다. 30만 시민 가운데 자그마치 5만여 명이 여의도 군용비행장으로 몰려들었다. 휘문·중앙·보성고보를 비롯한 서울시내 학교의 전교생이 깃발을 들고 나왔고 인천에서는 경인선 열차를 전세 내 타고 왔다. 일제 침략의 주역 사이토 총독까지 참석했다.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일본에 건너가 1920년 일본 오쿠리 비행학교를 졸업한 안창남은 1921년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처음 실시한 비행면허 시험에 수석 합격한 수재였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비행대회에 나가 우승을 휩쓴 스타였다.



아스팔트 걷어낸 생태연못엔 물벼룩 서식

그날 여의도 벌판에는 겨울바람이 세찼다. 비행하기 어려운 날씨여서 일행들이 만류했다. 하지만 안창남은 수만 군중을 더 기다리게 할 수 없다며 정오가 되자 격납고에서 비행기를 끌어냈다. 조선지도가 그려진 금강호(金剛號) 비행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습용으로 쓰는 뉴풀식 헌 비행기였지만 사람들은 함성을 울렸다. 경성악대의 주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안창남의 비행기가 여의도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동시에 목이 터져라 울려대는 만세 소리와 박수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눈물을 뿌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민족의 설움을 떨쳐내는 순간이었다.



“우리도 하늘을 날 수 있다. 우리도 해낼 수 있다.” 안창남은 울분을 안고 살아가는 겨레의 가슴에 희망의 불씨를 지핀 민족의 영웅이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대학살의 위기를 겪은 안창남은 이듬해 중국으로 망명한다.



여의도 공원에는 비행기에 얽힌 일화가 많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은 중국에서 미국 전략정보국(OSS)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끝내고 조국 광복을 위해 투입되기로 했던 요원들을 망연자실하게 했다. 광복군이 당당하게 되찾으려 했던 조국이었건만 기회를 잃고 만 것이다. 8월 17일, 미군 중령 버드를 단장으로 하는 24명의 요원을 태운 C-47 군용기가 중국 시안(西安)을 떠나 여의도 상공에 도착했다. 미 육군 소속 정운수 중위를 비롯해 광복군 이범석 장군과 김준엽·장준하 등이 탄 비행기였다. 그때까지 무장해제를 하지 않았던 일본군은 착륙을 막았다. 광복군을 태운 비행기는 도리 없이 평양에서 가솔린 공급을 받은 뒤 산둥성으로 기수를 돌려야 했다. 그후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이 여의도 공항을 통해 귀국한다.



여의도 공원 터의 100년 역사는 크게 보아 비행장 시대와 광장시대 그리고 공원시대로 나눌 수 있다. 대규모 집회와 시위로 들끓었던 광장에는 이제 제법 울창해진 소나무와 참나무, 작살나무 숲 사이로 괴불나무와 보리수, 산사나무가 붉고 앙증맞은 열매들을 매달았다. 10년 넘게 가꿔온 ‘한국전통의 숲’에는 꾀꼬리와 오색딱따구리가 찾아오고 물벼룩이 사는 생태연못에는 해오라기와 원앙이 노닌다.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공들여 만든 공원에는 자연이 깃들었다.



“여의도 공원 생태연못에는 물벼룩이 살아요. 물벼룩은 생태환경의 바로미터예요. 여의도가 완전히 살아났어요. 여의도는 물벼룩 모양이에요. 심장 모양 같기도 하구요. 여의도는 서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심장과 같은 곳이라고 생각해요. 심장이 깨끗해야 건강한 몸이 되잖아요.”



남편과 함께 현미경 관찰교실 강사로 활동하는 안순란(58)씨는 여의도 공원 지킴이를 자처한다. 매점과 화장실로 쓰던 낡고 비좁은 건물 대신 깔끔하고 넓은 교육시설을 세웠으면 한다는 그들은 여의도 광장 시절에 대해 부정적이다. 하지만 광장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이용자도 더러 있다. 그들은 협소한 광화문과 서울광장이 옛날 여의도 광장을 절대 대체할 수 없다고 회상한다.



여의도는 한강 개발의 꽃이다. 한강의 기적은 여의도가 발상지인 셈이다. 그 형국이 배 모양이건 물벼룩 혹은 심장 모양이건 여의도는 하나의 상징이자 기준이다. ‘여의도 면적의 몇 배’라고 말하는 어법이 그 한 예다. 100년 전 여의도는 한갓 강바람이 부는 목초지에 지나지 않았다. 기적의 여의도가 동아시아 금융경제의 심장이 되고 여의도 공원이 사색의 중심이기를 바라는 게 필자만의 몽상은 아닐 것이다.



김종록 객원기자·작가 kimkisan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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