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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되면 변신해야죠, 영원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중앙선데이 2010.10.31 02:41 190호 14면 지면보기
1992년 기아 감독직을 사임하고 경원대학교 사회체육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긴 방열씨. 2007년 정년을 맞을 때까지 정열적으로 연구와 강의에 몰두했다. 2003년의 모습.
취임식을 앞둔 방열 총장은 분주했다. 총장에 선임되자마자 안동에 내려가 브리핑을 듣고 학교 현황을 파악했다.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하자 사뭇 곤란해 하다가 어렵게 시간을 만들어냈다. 29일에 경기도 수지에 있는 집에 들르니까 그때 잠깐 보자고 했다. “수지까지 오시기가 좀 그러니까…”라며 올림픽주경기장 근처에 있는 테이크 아웃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그 커피숍은 기자와 방 총장의 집 딱 중간 거리에 있었다.

건동대 방열 신임 총장의 새로운 승부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 든 방 총장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한쪽 면에 뭔가를 복사한 이면지였다. 방 총장은 기자가 취임 소감과 포부를 물을 것으로 짐작했다. 소감은 말로 하고, 포부는 정확하게 뜻을 전달하기 위해 종이에 직접 써가며 설명할 참이었던 것이다. 방 총장은 “위치는 안동에 있지만 전국적인 명성을 지닌 작지만 알차고 강한 학교를 만들겠다”고 꿈을 말했다.

농구 감독으로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의 방열씨.1988년 서울올림픽에 남자농구 대표팀 감독으로 참가했을 때의 모습이다.
궁금한 것은 그의 소감이나 포부가 아니었다. 소감을 물어 봐야 “경기인 출신으로서 대학 총장이 됐으니 영광스럽고 책임감을 느낀다”고 대답할 것이 뻔하다. 실제로 방 총장은 그렇게 대답했다. 포부도 마찬가지였다. “학내 구성원들의 역량을 총동원해 단시간에 전국적인 경쟁력을 지닌 강소대학교를 만들겠다”는 대답은 새로울 것이 없다.

방 총장의 커리어에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그는 농구 선수로서 국가대표까지 해 보았고 감독으로서도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그러나 좋았던 시간에 연연하지 않았다. 선수 생활은 주변에서 아쉽게 생각할 만큼 짧았다. 그러나 그는 미련을 두지 않고 조흥은행 여자농구팀의 코치가 되었다. 74~77년에는 쿠웨이트 남자대표팀의 감독이 되어 색다른 경력을 쌓았다.

방열 총장
92년 국내 실업농구 최강팀 기아농구단을 떠나 경원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을 때는 농구인 모두가 놀랐다. 당시의 방 총장은 인기가 있는 농구 감독으로서 원하는 곳이 있다면 어느 곳으로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다른 분야로 점프해 버렸다. 주변의 만류가 심했지만 그의 태도는 저돌적이었다. 목표를 정한 그는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정해진 길을 갔다.

방 총장은 연세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한국체육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석사 학위를 준비하던 시기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려 국가대표 팀 감독으로서 태릉선수촌에 상주하던 1988년 무렵이었다. 그는 훈련이 끝나면 저녁 식사도 거르고 차를 몰아 대학원 수업을 들으러 갔다. 박사 학위를 준비할 때는 기아가 무적의 팀으로 승승장구하던 시기였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매 순간이 행복할 때 저는 제 선배님과 선생님들이 먼저 걸어가신 길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앞으로 나가야 할 길을 찾을 수가 있었어요. 농구 선수건 감독이건 영원히 할 수는 없는 것이고, 하고싶은 일이 생각나면 근면하게 준비해서 시기가 되면 행동으로 옮기는 겁니다.”

방 총장은 지금도 경복고등학교 재학 시절의 은사를 방문하고 가르침을 받는다. 그는 인생에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베푼 스승으로 남도영(88) 선생을 꼽는다. 남 선생은 1952년 동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9년 동국대 교수가 되었으며 동국대 경주캠퍼스 부총장 등을 역임하다가 87년 2월 퇴임하였다. 방 총장은 남 선생이 경복고 교사로 근무할 때 가르침을 받았다.

“남 선생님은 쉬지 않고 공부하시고 노력한 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선생님으로도 훌륭하셨지만 대학에 가셔서 교수가 되셨고, 나중에는 행정가로서도 훌륭하게 역할을 해내셨죠. 저는 그분을 보면서 ‘나도 저런 사람이 돼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방 총장은 농구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은 적이 없다. 농구 선수, 지도자, 교수, 총장 등 그가 걸어온 길은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가닥인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방 총장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속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도전과 성취, 대결과 승부 등 방 총장의 몸에 밴 승부사의 본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저는 선수 시절부터 승부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선수는 주어진 테두리 안에서 맡은 임무만 해내면 되지요. 감독은 선수를 관리하고 작전을 준비하고 경기 결과에 책임을 집니다. 감독의 승부는 호흡이 짧죠. 한두 판의 경기나 몇 시즌이에요. 교수는 제자를 가르쳐 졸업 이후, 아니 그 제자가 삶을 마감할 때까지 책임을 지는 오랜 승부를 합니다. 총장요? 총장은 지휘자이고 매니저로서 무한책임을 진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의 휴대전화기는 쉴 새 없이 진동했다. 대부분 축하 전화였고, 그는 대부분의 통화를 인터뷰가 끝난 다음으로 미루었다. 하지만 현대나 기아에서 감독으로 일하던 시절 지도한 제자들로부터는 전화가 없다며 입맛을 다셨다. 다른 누구보다 그들의 축하를 가장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 총장은 묻지도 않았는데 “운동에 전념하며 살아온 친구들이라 생활의 테크닉은 좀 부족하다”고 대신 변명했다.

“엊그제 이길여 총장님께서 전화를 주셨어요. 축하한다고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하라고 당부하시더군요.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건동대 총장으로 일하는 동안 그분께도 자주 연락 드리고 배우려고 합니다.”

방 총장이 1992년부터 2007년까지 교수와 대학원장으로 일한 경원대는 떠들썩한 분위기다. 김남수 사회체육과 학과장은 “우리 학교의 영광이자 체육학계의 경사”라며 기뻐했다. 방 총장은 ‘앞서 걸어가는 사람’으로서 그가 가르친 경원대의 제자들과 후학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단지 경원대뿐 아니라 농구계와 체육인들에게 목표가 되는 인물이 됐다.

커피숍에서 식당으로 옮겨가며 인터뷰하는 동안 안동으로 떠날 시간이 가까워졌다. 평생 승부사인 방 총장도 숨가쁜 일정에 쫓겨 마음이 급한지 곰탕 한 그릇을 다 비우지 못했다.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그는 말했다. 아껴뒀던 말인 듯했다.

“요즘 농구는 감독도 선수를 무작정 끌고 가서는 이길 수 없는 농구예요. 대학도 마찬가지겠지요. 교수들은 모두 학자고, 맡은 분야의 전문가들입니다. 그분들을 끌고 간다는 건 적절한 표현이 아니고, 모두가 공감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먼저 달릴 생각입니다. 아직 밝힐 수는 없지만 방향은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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