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종, 자기 날개 자르는 줄도 모르고 개화파 제거

중앙선데이 2010.10.31 02:04 190호 28면 지면보기
우정총국 건물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있으며 그 옆에 조계사가 있다. 개화당은 한국 최초의 우편행정기관인 우정총국의 낙성식 연회를 정변의 계기로 삼았다. 사진가 권태균
개국군주 망국군주 고종⑥ 갑신정변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김옥균(金玉均)은 고종의 명으로 일본 시찰 중에 임오군란(1882) 소식을 듣고 서광범(徐光範) 등과 함께 급거 귀국했다. 김옥균은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번 출신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일으켜 일본을 근대국가의 길로 이끈 것이 불과 14년 전(1868)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고종은 임오군란 직후 철종의 부마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를 수신사(修信使)로 삼아 일본에 파견했는데, 김옥균도 동행했고, 민비의 조카로 정권 실세였던 참판 민영익(閔泳翊)도 함께했다.

김옥균 묘지 일본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 있다. 일본인들은 망명한 김옥균을 냉대하다가 그가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자 머리카락과 의복 일부를 가지고 묘소를 만들었다.
박영효는 기행문 사화기략(使和記略)에서 효고현(兵庫縣)에 도착해 “새로 만든 국기를 묵고 있는 누각에 달았다”고 밝히고 있는데, 태극기를 달았다는 사실은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조선 개화파의 비조(鼻祖)는 중인 출신 역관 오경석(吳慶錫)이었다. 오경석은 병인양요(1866) 때 청나라 예부상서 만청려(萬靑藜) 등을 통해 습득한 프랑스군과 청나라의 동태를 대원군에게 밀보(密報)해 큰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신미양요(1871) 때 대원군에게 ‘도저히 외교를 열지 않을 수 없는 소이’를 설명했다가 버림을 받고 말았다.

이후 오경석은 “먼저 북촌(北村: 서울의 양반 사대부 거주지)의 양반 자제 중에서 인재를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를 설득했다. 훗날 박영효가 이광수에게 “그 신사상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홍영식·서광범 그리고 내 백형(박영교)하고 재동 박규수 집 사랑에 모였지요(이광수, 박영효 씨를 만난 이야기)”라고 말한 것처럼 박규수의 사랑방은 양반 출신 청년 개화파를 양성하는 정치학교가 되었다. 박규수 사망 후 개화파는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로 나뉘는데 온건 개화파는 김홍집(金弘集)·김윤식(金允植)·어윤중(魚允中) 등이고, 급진 개화파는 김옥균·박영효· 홍영식(洪英植)·박영교(朴泳敎)·서광범 등이었다. 온건 개화파는 동양의 정신세계에 서양의 과학기술을 접목시키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창했다.

서광범 사진 서광범은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갑오개혁 때 학부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서재필(徐載弼)이 ‘그(김옥균)는 늘 우리에게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아시아의 불란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그의 꿈이었고 유일한 야심이었다(서재필, 회고 갑신정변)”라고 말한 것처럼 김옥균은 조선 체제를 바꾸는 전면적인 개혁을 바랐다. 가장 큰 걸림돌은 청나라와 그를 추종하는 친청 수구파였다. 임오군란 후 청나라는 조선에 “무릇 외우(外憂)에 관한 일은 일체 청국에 문의하라”고 지시했고, 청의 오장경(吳長慶)은 고종에게 “내가 3000 군대를 거느리고 여기에 와 있으니 매사에 황조(皇朝: 청의 조정)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고 협박했다. 청나라는 임오군란 직후인 고종 19년(1882) 8월 조선과 ‘상민수륙(商民水陸)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 조선을 ‘속방(屬邦: 속국)’이라고 명기했다.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정권을 되찾은 민씨 척족정권은 청의 이런 횡포에 항의 한마디 하지 못했다.

고종 21년(1884) 5월 당초 개화파였던 민영익이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고 돌아온 뒤 친청 수구파로 전향하면서 개화당은 더욱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미국 공사관의 무관 포크(George C Foulk)가 “나는 민영익을 방문했는데 두 파 사이의 의견 차이가 너무 심하여 도저히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사를 논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 대로 두 정파 사이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박영효는 일본공사관의 서기관 시마무라 히사시(島村久)에게 “우리들은 소수인 데다 국왕은 반신반의(半信半疑) 태도이고, 왕비는 저들(수구파)의 말을 믿고 점차 마음을 돌리게 되어 마침내 우리들의 충언을 듣지 않게 되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고종 부부의 개화 의지도 퇴화하고 있었다. 윤치호(尹致昊)가 “고우(古愚) 김옥균을 만났는데 여러 민씨들이 고우를 집어삼키려 하여 마지 않는다고 한다”고 전한 것처럼 김옥균은 민씨들의 제거 대상이었다.

민비를 정점으로 민태호·민영목·민영익·민영소·민응식 등 이른바 오민(五閔)이 정권을 독차지했다. 민씨 척족정권은 우영사(右營使)에 민영익을 앉히고 전영사(前營使) 한규직, 후영사 윤태준, 좌영사 이조연 등 자신들을 추종하는 인물들에게 군사지휘권을 주었다. 정치권력과 군사권력이 모두 수구파에게 돌아가자 김옥균은 비상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옥균은 박영효의 집에서 “우리들은 수년 동안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각고진력해 왔으나 그 공효가 없을 뿐 아니라 금일 이미 사지(死地)에 들어가게 되었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결심에는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朴泳孝邸ニ洪英植·金玉均·徐光範ト島村久談話筆記要略)”라고 정변을 각오했다. 1884년 봄 안남(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분쟁이 생기자 청은 조선 주둔 3000 병력 중 1500명을 안남으로 이동시켰다. 그해 8월 청불(淸佛)전쟁에서 청나라가 연전연패하자 김옥균은 호기라고 생각했다. 영어 통역을 맡았던 윤치호가, “고우(古愚: 김옥균)가 미국 공사를 방문해서 청불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우리나라가 독립할 기회가 어찌 이때에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라는 등의 말을 하고 갔다(윤치호 일기, 1884년 8월 3일)”고 적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개화당은 정변을 위한 무력을 양성했다. 일본에 유학시킨 서재필(徐載弼) 등 14명의 사관생도들은 중요한 무력이었고, 육군도야마학교(陸軍戶山學校)에서 사관교육을 받은 신복모(申福模)가 만든 43명의 충의계(忠義契)도 있었다. 광주 유수 박영효도 500여 명의 군사를 길렀으며, 윤치호의 부친인 함경 남병사(南兵使) 윤웅렬(尹雄烈)도 북청(北靑) 지역의 장정 470여 명을 훈련시켰다. 무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고종의 밀지가 필요했다. 김옥균은 일본의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에게 보낸 조선 개혁의견서(改革意見書)에서 ‘조선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개혁을 강행해야 하는데, 무력을 행사하려면 국왕의 밀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김옥균은 갑신일록(甲申日錄)에서 고종에게 밀칙(密勅)을 내려달라고 간청했더니 “(고종이) 즉시 칙서를 쓰셔서 수결하시고 옥새를 찍어서 내려주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개화당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수구파를 몰아내고 대개혁정치를 실시하려 한 것이다. 개화당은 독자적인 정변을 구상했으나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가 ‘청국이 장차 망할 것이니 귀국의 개혁지사들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거들면서 연대하기로 결정했는데, 다케조에는 일본공사관 호위병 150명이면 청국군 1000여 명과 맞설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드디어 고종 21년(1884) 10월 17일 개화당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총국(郵政總局) 낙성식의 날이 밝았다. 김옥균은 망명 후에 쓴 갑신일록에서 고종을 경우궁(景祐宮)으로 모시고 내위(內衛)는 충의계가, 중위(中衛)는 일본군이, 외위(外衛)는 조선군이 담당하는 3중 호위망을 구축하기로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낙성식 축하연 도중 별궁(別宮)에 불을 지르는 것이 신호였는데, 별궁 방화에 실패해 우정총국 북쪽의 민가를 대신 불질렀다. 신호가 떨어지자 미리 지목한 친청 수구파에 대한 제거작전이 전개되었다. 도주하던 우영사 민영익은 중상을 입었고, 한규직·이조연·조녕하 등 군권을 장악했던 수구파 영사(營使)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민태호·민영목·조녕하 등 민씨·조씨 척족들도 제거했는데, 고종실록은 “임금이 연달아 ‘죽이지 말라’고 말했으나 듣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 부부를 경우궁으로 모신 개화당은 이튿날인 10월 18일 신정부를 수립했다. 고종의 종형 이재원(李載元)을 영의정으로 추대하고 병조판서도 그 아우 이재완(李載完)을 추대하는 대신 전후 영사(營使)는 박영효, 좌우 영사는 서광범이 차지해 개화당이 군사지휘권을 장악했다. 김옥균은 판서 없는 호조참판이 되어 재정을 장악했는데, 대체로 대원군 계열의 종친과 개화당의 연립내각이었다. 개화당이 미국·영국·독일 공사 등을 부르자 고종은 외교사절들에게 신정부의 수립과 대개혁정치의 시작을 통지했다. 신정권은 수십개 조의 개혁정강을 발표했는데 김옥균은 갑신일록에서 그중 14개 조에 대해서 적고 있다. ‘①대원군을 귀국시키고 청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한다 ②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재능에 의해 인재를 등용한다 ⑪사영(四營)을 일영(一營)으로 통합하고 왕세자를 육군 대장으로 정한다 ⑫일체의 국가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한다’ 등의 항목이 눈에 띈다. 신분제도를 폐지하고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창하고 재능에 의한 인재 발탁을 주창한 것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청군의 원세개(袁世凱)는 개화파로 위장한 경기관찰사 심상훈(沈相薰)을 통해 민비의 밥사발 밑에 서찰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원세개는 나아가 우의정 심순택(沈舜澤)에게 조선 정부의 대표자격으로 청군 출동을 요청하라고 권고했고 심순택은 동조했다. 임오군란 때 청군을 끌어들였던 판서 김윤식도 청군의 출동을 요청했다. 고종은 10월 19일 오후 3시 ‘대정유신(大政維新)의 조서(詔書)’를 내려서 신정부가 대개혁을 단행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그 마음은 이미 신정권에서 떠나 있었다. 고종은 적은 병력의 신정권이 방어하기 곤란한 창덕궁으로 이어할 것을 거듭 요청해 관철시켰다. 청군 1500명이 일제히 돈화문과 선인문을 공격하자 민비는 창덕궁 북산으로 도주해 고종을 불렀다. 외위(外衛)를 맡은 조선 친군영 500여 명이 응전하다가 수십 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중위(中衛)를 맡은 일본군은 정변에 가담하지 말라는 외무대신의 훈령이 오면서 소극적으로 변했다. 김옥균 등은 고종과 인천을 거쳐 강화도로 가서 청과 계속 항전하려 했으나 고종은 “나는 결코 인천으로 가지 않겠다”고 반대했다.

드디어 10월 19일 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갑신정변 ‘3일 천하’는 끝나고 말았다. 국왕을 호위해 청군에 넘긴 홍영식·박영교·신복모 등과 사관생도들은 모두 사형당했다. 고종은 청군 출동에 공이 컸던 심순택을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신정권에서 발표한 일체의 개혁정령은 모두 폐지하고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을 5적(賊)으로 규정했다.

김옥균 등은 조선의 이토 히로부미를 꿈꾸었지만 고종은 이토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고종은 부국강병한 근대국가 건설에 목숨을 걸었던 개화당을 제거하는 것이 자신의 우익을 제거하는 것이란 인식조차 없었다. 청·일 두 나라는 1885년 1월 천진조약을 맺었는데 그중에 “일국(一國)이 파병을 요할 때는 마땅히 상대방 국가에 문서로 알려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있었다. 청일전쟁의 싹이 트고 있었던 것이다.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