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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자본 있는 곳에서 발전, 아시아 페어도 성공 가능성 충분”

중앙선데이 2010.10.31 02:02 190호 2면 지면보기
1 클림트 그림을 설명하는 사무엘 켈러
스위스 바젤에서 트램으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바이엘러 재단은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아름다운 미술관이다. 9월 26일부터 내년 1월 16일까지 열리는 ‘빈 1900’ 전에 맞춰 이곳을 찾았다. 이번 전시는 요제프 호프만,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를 비롯한 미술가들과 디자이너들이 1897년 빈 세세션(Vienna Secession)이라는 모임을 결성한 시기부터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이자 구스타프 클림트가 세상을 떠난 1918년까지, 빈이 미술과 디자인에서 창조적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했던 시기에 초점을 맞췄다. 프레스 콘퍼런스가 끝나고 미술관에서 가장 조용하고 아름다운 장소인 ‘모네의 전시장’에서 바이엘러 재단의 디렉터 사무엘 켈러(44)를 만났다.

미술 도시 스위스 바젤의 지휘자, 바이엘러 재단 디렉터 사무엘 켈러

'빈 1900'은 어떤 전시인가.
“재단의 디렉터가 된 순간부터 나는 유럽에서 근대 미술 역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후세대 작가에게 큰 영향을 미친 두 작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전시를 기획하려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먼저 이 전시를 맡아 줄 재능 있는 큐레이터가 필요했다. 현재의 시각으로 1900년대 빈을 신선하게 조명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나는 바이엘러 재단에서 이미 프랜시스 베이컨 전시를 기획했던 초대 큐레이터 바버라 스테픈을 만났다. 그녀는 빈 출신이었으며, 이 분야의 전문가였다.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의 전시는 없었기에 보다 신선한 느낌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나의 고유한 아이디어를 전시로 실현시키게 됐다. 이것이 바로 미술관 디렉터의 역할이다. 좋은 전시 아이디어를 실제로 만들어내는 일 말이다.”

2 바이엘러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 이상 사진 최선희 3 바이엘러 미술관에서 가장 조용하고 아름다운 공간인 39모네의 방39사진 Todd Eberle
바이엘러 재단 디렉터를 제안받았을 때는 아트 바젤의 잘나가는 디렉터였다. 망설여지지 않았나.
“에른스트 바이엘러는 아트 바젤의 창시자였고, 나는 아트 바젤의 디렉터였다. 아주 어렸을 적에 그가 한 공원에서 기획한 전시를 본 것이 내가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다. 그의 작품을 보는 관점, 좋은 전시를 보여주는 방법 등에 대해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아무튼 바이엘러와 나는 서로 알고 지내기는 했고 일종의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놀랐다. 많은 제안을 받았지만 아트 바젤 디렉터 자리를 떠나고 싶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일을 매우 즐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느 날 바이엘러는 나를 재단으로 불러 미술관을 보여주었다. 그때 나는 내가 주로 일요일에 쉬러 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에서 일하게 되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결국 나는 이 미술관에 대한 사랑으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바이엘러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나의 멘토였다. 나는 그의 평생의 손길이 담긴 이 미술관을 다음 세대로 전달해주는 것이 그에게는 매우 어려운 숙원임을 직감했다. 나는 그래서 이러한 것을 내게 인계하고자 하는 그에 대해 매우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이 미술관이야말로 그의 평생의 작품이 아니었겠나?”

왜 바이엘러는 당신을 디렉터로 주목했나.
“잘 모르겠다. 바이엘러에게 여쭤봐야 하지 않을까?(웃음). 그가 내가 하는 일들을 오랜 시간 두고 지켜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 스스로에 대해 말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그는 내가 작품을 볼 때에 최고의 퀄리티에 집중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건 그와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둘 다 미술을 대할 때에 매우 국제적인 시각과 오픈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둘 다 클래식한 미술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살아 있는 동시대 작가들이 어떤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지에 대해서도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역사와 컨템퍼러리에 관심이 있었고 나는 그가 평생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공유했다.”

하지만 바이엘러나 당신에게나 모험이었을 것도 같은데.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일하면서 우리 둘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출발했다. 하지만 그와 일을 시작한 이후 모든 것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됐다. 매우 행복한 허니문처럼 말이다. 그는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처음부터 나에게 자유와 함께 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나는 그래서 매우 슬펐다.
아무튼 이 일은 내게 큰 기쁨을 가져다 준다. 이곳에 온 이후 기존에 알고 지내던 수많은 작가 중 단 몇 명의 작가들과 일할 뿐이지만 그 깊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어졌다. 이들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해 더 깊게, 더 오래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감사하게 됐다.”

당신은 수많은 작품과 사람들 그리고 끊임 없는 여행들로 가득 찬 세계에서 매우 다른 세계로 들어온 듯해 보인다. 바이엘러 재단의 가장 특별한 점은.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 전시장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우리 앞에 있는 저 모네의 연꽃 연못 그림을 보라. 아마 모네가 남긴 연꽃 연못 시리즈 중 가장 위대한 그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왼쪽으로 시선을 돌려 저 창문을 보면 그 밖에 실제로 존재하는 아름다운 연꽃 연못이 있다. 실제 연꽃들이 가득 피어 있다. 이렇게 예술과 자연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장소의 가장 특별한 점이 아닐까 한다. 또한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뮤지엄의 기능을 주로 하지만 관람객들이 이곳을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도록 한 렌조 피아노의 건축 때문이기도 하다. 소파, 자연광, 평온함과 우아함, 그저 편안하고 행복하게 느끼면 된다. 이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또 다른 큰 행복이다.”

지금도 출장이 많나.
“재미있는 사실은 훌륭한 작품을 갖고 있으면 사람들이 그 작품을 보러 온다는 것이다.(웃음) 이곳에 온 이후로 내가 가서 만나야 했던 사람들이 다 이곳으로 온다. 아트 바젤 기간에만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연중 내내 찾아온다. 재단은 1년 365일 문을 여는데, 거의 매일 흥미로운 사람들과의 미팅이 있다. 리서치나 작가와의 만남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이나 두 번 정도 여행하지만 장거리 여행은 많이 줄었다. 여행할 필요도 많이 줄었지만 시간도 많이 줄었다.”

바이엘러 재단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인데 매우 영향력 있는 뮤지엄이 됐다. 그 이유는.
“바이엘러 재단은 스위스에서 관람객이 가장 많은 미술관이자 세계적인 미술관이다. 연간 미술관을 찾는 30만 명 중 50%가 외국인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근대 미술 컬렉션이 있다. 따라서 세계의 많은 미술관들로부터 대여 요청이 온다.
이곳 컬렉션들은 그저 예술품들이 아니라 가족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과 나는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이들을 보는 매 순간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 나는 같은 세대의 작가들이 이 미술관에서 어떻게 역사와 소통하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를 기획한다. 예를 들어 바스키아 전시와 동시에 펠리스 곤잘레스 토레스(Felix Gonzalez Torres)의 전시를 함께 기획했다. 이런 시도를 통해 사람들은 ‘오 이렇게 이 현대미술 작품들이 워홀, 피카소 또는 반 고흐까지 연결이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미술품 전시 외에 콘서트와 세미나 등이 연중 열리고 있고 미술관 외부나 다른 도시에서 진행되는 공공 프로젝트도 함께 기획하고 있다. 또 바스키아 전은 파리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이렇게 바이엘러에서 기획하는 전시가 세계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디렉터로서 나의 포부이기도 하다.”

바이엘러 재단에서 기획하는 전시는 매우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특히 미술 시장에 있어서 말이다. 예를 들어 자코메티 전시 이후 소더비 경매에서 자코메티 기록 갱신이 있지 않았나. 어떤 사람들은 바이엘러 재단과 메이저 컬렉터 간의 모종의 계약이 있다고까지 하는데.
“우리는 결코 한 작가가 미술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우도록 하기 위한 전시를 기획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경우 결국 우리는 이에 의해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이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려 할 때 가격이 너무 오르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품에 대한 보험료도 더 많이 지불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주고, 젊은 세대들에게 영향을 주고, 또 그로 인해 그의 영향력이 시장에서도 높아질 수 있다면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컬렉션을 팔지 않는다. 바이엘러 재단은 상업 갤러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젤의 문화 인프라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바젤 하면 아트 바젤이 먼저 떠오르는데, 바젤의 문화적 성공은 아트 바젤 덕분인가.
“아니다. 바젤의 문화적 힘은 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젤은 스위스 도시로서는 처음으로 미술품을 소장한 도시이고,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도시 커뮤니티에 의해 공공 컬렉션을 시작한 곳이다. 그리고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현대 미술만을 소개하는 미술관을 건립한 도시다. 중세의 한스 홀바인부터 시대마다 위대한 작가들이 바젤에서 작업을 했고 현재는 현대 미술 커뮤니티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바젤은 건축의 도시다. 헤르조그와 드므롱, 렌조 피아노, 안도 다다오, 마리오 보타, 피터 줌토 등 위대한 현대 건축가들이 디자인한 건축물들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바젤을 찾는다. 또한 바젤은 뮤지컬 센터를 갖춘 음악의 중심지다. 아트 바젤은 이러한 것을 집중해서 보여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바젤이 열리는 일주일은 마치 확대경처럼 이러한 것들을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다.”

아시아 도시에서도 아트 바젤의 영향력에 버금가는 페어가 정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연하다. 하지만 아트 바젤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트 바젤은 40년의 역사 속에서 세계 정상급 페어로 정착할 수 있었다. 예술은 자본이 풍부한 곳에서 발전한다. 아시아의 많은 도시들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아트 바젤은 1990년대부터 아시아 작가들과 갤러리를 초대해오고 있다. 그리고 아시아 각국에 아트 바젤 특파원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아트 바젤의 강점은 엄격하게 퀄리티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트 바젤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것에 중점을 둔다면 아시아의 아트 페어들도 충분히 세계적으로 성공할 수 있고, 현재보다 훨씬 큰 미술 시장이 활성화될 것이다.”

한국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은 언제였나.
“삼성미술관 리움이 오픈했을 때 방문했다. 광주 비엔날레도 가보고 서울의 갤러리들도 방문했는데, 당시 한국이 아시아 나라 중 미술계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친한 친구 중에 한국 친구가 있어서 특히 남다르다. 그리고 나는 한국 음식을 매우 좋아한다.”

바이엘러 재단의 전시를 한국에서도 볼 수 있을까.
“언젠가 그런 날이 오리라 확신한다. 살아생전 바이엘러가 이미 이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뮤지엄 간의 네트워크가 정립돼야 하고, 미래에 대해 먼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아무튼 그런 기회가 와서 다시 한국을 방문할 수 있다면 매우 기쁠 것이다.”



최선희씨는 런던 크리스티 인스티튜트에서 서양 미술사 디플로마를 받았다. 파리에 살면서 아트 컨설턴트로 일한다.『런던 미술 수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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