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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아느냐, 과묵한 ‘병풍’들의 속마음을

중앙선데이 2010.10.31 01:56 190호 4면 지면보기
도쿄에 온 지 8개월째, 일본어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는다. 제자리를 맴도는 일본어 실력에 낙담해 있을 때 의외의 자극이 되어주는 존재들이 나타났으니, 바로 요즘 일본 TV에 자주 등장하는 한국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다.

이영희 기자의 코소코소 일본문화: 일본어와 싸우는 한국 아이돌 그룹들

두 번째 일본어 싱글 ‘지(Gee)’로 드디어 오리콘 차트 1위에 오른 ‘소녀시대’. 음악 프로 ‘뮤직 스테이션’에 등장한 ‘소녀시대’의 수영은 “전부터 멤버들이 정말 좋아하던 방송이었다”며 유창한 일본어로 사회자와 대화를 나눈다. 아침 정보프로에 나온 ‘카라’의 멤버 박규리양, “나의 아름다움을 일본 전국에 알리고 싶다”며 특유의 ‘여신 유머’로 일본인들까지 웃겨 준다. ‘동방신기’의 멤버였던 영웅재중이 출연한 일본 드라마 ‘솔직하지 못해서’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건 재중의 능숙한 일본어 대사 처리. “아유, 저렇게 바쁜 친구들도 일본어 공부에 열심인데, 나라고 놀고 있을 수만은 없지.” 의욕이 절로 샘솟는다.

그러고 보면 한국산(産) 아이돌로 살기란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노래에, 춤에, 예능감까지 익히는 걸로는 부족해 외국어 공부도 필사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 아이돌이 등장할 때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에 유창하다’는 부가 설명이 따라붙는 건,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만의 문화가 아닐까 싶다.

최근에는 걸그룹들이 한국에서 히트한 곡을 가사만 일본어로 바꿔 일본 시장에 내놓는 것에 대해 비판도 많은 모양. “당당히 한국어 노래를 들고 나가지 왜 일본어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느냐”는 주장이다. 하지만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일본의 음반시장은 철저하게 자국 음악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특히 미국이나 유럽 외에 아시아 지역의 음악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런 일본 시장에서 승부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일본어로 노래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 만약 ‘소녀시대’가 한국어로 부른 ‘지(Gee)’를 그대로 들고 갔다면 오리콘 차트 정상에 오르는 게 가능했을까.

능숙하지 않은 일본어로 노래하고 말하느라 애쓰는 그들을 보며 ‘동병상련’을 느끼고 있던 차에, 얼마 전 한국 인터넷을 달군 ‘포미닛’(사진)의 ‘병풍 굴욕 사건’에 마음이 한없이 짠해졌다. 우연히 그들이 나온 니혼 테레비의 아침방송 ‘폰’을 보게 됐는데, 목격자의 입장에서 진상을 전하자면 이렇다. ‘10분 안에 만들 수 있는 속성 파티 요리’를 소개하는 코너였고, 최근 일본에서 ‘퍼스트’라는 신곡을 발표한 포미닛이 게스트로 초대됐다. 그러나 생방송, 게다가 야외에서 쉴 틈 없이 요리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포미닛 멤버들은 대화에 끼어들 타이밍을 찾지 못했고, 10여 분간 다른 진행자들의 뒤에 병풍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포미닛도 일본어를 꽤 잘한다. 그러나 일본인끼리의 수다가 정신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적절한 순간, 적절한 길이로(말이 길어지면 진짜 실력이 드러나므로) 적절한 내용의 멘트를 던진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방송 말미에야 음식을 맛보며 “오이시이(맛있어요)~”라고 큰 소리로 감탄하는 포미닛을 보고 있자니, 수업이 끝난 후 “오쓰카레사마(수고하셨습니다)~”만은 유독 크게 외치는 내 모습이 오버랩됐다.
소녀들이여, 우리 너무 좌절하지 말자고. ‘일본어 페라페라(술술)’의 그날까지, 기꺼이 한 폭의 아름다운(!) 병풍이 되어 주자고.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현재 도쿄 게이오 대학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하고 있다. 아이돌과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을 학업으로 승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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