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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쟁탈전

중앙선데이 2010.10.31 01:15 190호 10면 지면보기
내가 다니는 회사는 직원의 90%가 여성이다. 그러다 보니 회사 분위기나 조직문화가 아무래도 여성적이다. 회식이나 각종 행사가 여성 위주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화장실도 여자화장실 수가 훨씬 많다. 물론 당연한 일이고 합리적인 결정이기 때문에 전혀 불만은 없다. 다만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꽤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한다.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한 회사에서 함께 일하다 보면 생리적 주기도 비슷해지는 것인지 화장실을 이용하는 시간대도 거의 같다. 몇 번인가 굳게 닫힌 화장실 문 앞에서 돌아설 때면 마치 문을 열어주지 않는, 변심한 애인의 집 앞에서 돌아서는 남자의 심정처럼 나는 알 수 없는 분노와 질투와 자책에 시달린다.
몇 번의 허탕 끝에 마침내 비어 있는 화장실로 들어설 때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감격한다. 그러나 기쁨은 짧다. 좁은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내가 쓰는 화장실이 나를 말해주는 것 같아 울적해지곤 한다”는 작가 김애란의 문장이 떠올라 나도 울적해진다.

세상의 많은 일에 타이밍이 중요하겠지만 볼일처럼 타이밍이 중요한 것이 있을까. 몇 번의 타이밍을 놓치고 나면 좀처럼 볼일을 보지 못한다. 마음은 굴뚝 같은데 도무지 연기가 나오지 않는다. 무엇이든 한자리에 오래 머물다 보면 못쓰게 된다. 굳고 딱딱해진다. 고착이다. 그렇게 들어앉아 있으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법이다.

아무리 용을 써도 소용이 없을 때, 그때 떠오르는 것은 그람시의 문장이다. 독일사는 후배는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방금 이탈리아에서 돌아왔습니다. 사업상 간 길에 제 논문 자료로 쓸 고대 문헌 몇 가지 찾아오느라 베네치아 부근의 파도바에서 좀 머물렀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베네치아 광장이 물에 잠길 정도로 비가 많이 왔지만 그래도 참 좋았습니다. 파도바대학 도서관의 곰팡이 냄새 푹푹 나는 낡고 오래된 책더미 사이에서 주로 졸거나 갈릴레이와 천체망원경을 같이 보는 상상이나 하며 지냈는데도. 다시 공부만 하던 학생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도 했습니다.

참, 갈릴레이가 가르쳤다던 파도바대학의 도서관, 그곳 화장실 문짝에 이런 낙서가 있더군요.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라.- 안토니오 그람시. 부디 형도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시길 빕니다.”
화장실 문짝에 그람시의 문장을 쓴 이는 아마 변비로 비관하는 사람일 것이다.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쓴 것이겠지만 어쩐지 그 글귀는 꼭 나를 위해 쓰여진 것 같다. 좁은 화장실에서 용을 쓰고 있을 때면 그람시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람시의 격려 때문일까? 나는 가까스로 볼일을 본다. 마무리를 하려는데 이번에는 휴지가 없다. 없는 것은 아니고 부족하다. 나는 대략 열두 칸 정도 쓴다. 네 칸을 한 단위로 끊어서 세 단위 정도를 사용하는데 두 단위만 있었다.평소 존경하는 친구와 화장실 휴지에 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친구는 한 단위만 쓴다는 것이다. 즉 네 칸이면 충분하다. 나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알 수 없었지만 그를 존경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은 분명했다. 내가 놀라워하자 친구는 부끄러워하며 이렇게 말했다.“난 아직 멀었어. 아버지는 두 칸만 쓰셨는데.”

그렇다.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자.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스스로 우유부단하고 뒤끝 있는 성격이라 평한다. 웃음도 눈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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