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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의 시시각각] 황장엽의 독약 캡슐

중앙일보 2010.10.17 20:05 종합 38면 지면보기








세계사에는 수많은 고발자(告發者)와 망명객이 있다. 어떤 고발이 가장 처절한 것인가. 그것은 고발자가 고발하는 억압체제가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그리고 고발자가 고발을 위해 무엇을 희생하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황장엽은 역사상 가장 처절한 고발자의 한 사람으로 기록될 것이다.



 공산체제의 폭압성을 가장 먼저 고발한 이는 소련의 솔제니친이다. 그는 스탈린·흐루쇼프 공산독재에 문학으로 저항했다. 노동수용소 8년과 유형생활 3년을 겪었고 1974년 추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노벨문학상(1970년)을 받았고 반(反)체제 물리학자 사하로프는 노벨평화상(1975년)을 받았다. 두 사람은 85년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체제가 들어설 때까지 소련의 반(反)문명을 고발한 대표적인 종소리였다.



 영국의 조지 오웰도 스탈린 독재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자였다. 그는 원래 사회주의자였다. 미얀마에서 가혹한 식민통치를 보고 파리·런던에서 빈민·부랑아 생활을 체험하면서 그는 사회주의 계급혁명을 꿈꿨다. 그러다가 스페인 내전에서 사회주의자의 탐욕과 당파성을 목격하면서 그는 고발자로 변신하게 된다. 그러한 고발의 목소리가 소설 『동물농장』과 『1984년』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널리 알려진 체코의 밀란 쿤데라도 소련 전체주의에 대한 끈질긴 고발자였다. 많은 사회주의 고발자처럼 그도 처음엔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공산주의의 다른 얼굴을 목격하게 된다. 68년 ‘프라하의 봄’ 때 그는 하벨(훗날 체코 대통령) 같은 동료와 함께 소련에 저항했다. 그는 추방됐고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그곳에서 『웃음과 망각의 책』 같은 체제고발 작품을 집필했다.



 황장엽은 어떤 망명객 못지않게 처절하게 공산독재의 반(反)문명을 고발했다. 그는 고발을 위해 가족을 버렸다. 부인은 자살했고 아들은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간은 대의(大義)를 위해 얼마나 독해질 수 있는가. 그는 평양을 떠나기 전날 아내에게 이렇게 적어놓았다고 한다. “나를 용서하지 말라. 나와 당신이 언젠가 함께 만날 수 있는 저세상이 있기를 바란다.”



 같은 망명이어도 솔제니친이나 쿤데라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진 않았다. 탈북 시인 장진성씨에 따르면 황 선생은 양복 옷깃 뒤에 독약 캡슐을 숨겨놓았다고 한다. “김정일이 나를 죽이려 하는데 (비상시에) 그놈들 손이 아니라 내 손으로 죽으려고” 가지고 다녔다는 것이다. 솔제니친과 쿤데라는 나중에 ‘자유(自由)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황장엽은 고향에서 3대 세습 우상화가 극에 달한 날, 이국 땅에서 죽어야 했다. 솔제니친, 쿤데라, 그리고 오웰은 모두 공산독재의 폭압성을 고발했다. 그러나 황 선생이 고발한 북한에는 폭압 말고도 더한 게 있다. 신격(神格)에 다다른 개인숭배다. 소련에도 스탈린 숭배가 있었지만 북한처럼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이어지는 만화 같은 우상화는 아니었다.



 지금도 지구상에서는 많은 망명객이 폭압체제를 고발하고 있다. 아얀 히르시 알리는 소말리아를 탈출해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그녀는 시나리오를 써서 이슬람 극단주의의 끔찍한 여성학대를 고발했다. 영화를 만든 감독은 푸줏간 칼에 꽂혀 살해됐다. 목숨을 건 고발자를 가장 가치 있게 보상해 주는 길은 그들의 입과 손과 발을 최대한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침 한 방울이라도 놓치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를 모아 폭압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다.



 고발자 황장엽은 불행하게도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제대로 보답을 받지 못했다. 그는 모든 걸 버리고 뛰쳐나왔는데 두 정권은 그를 오히려 새장 속에 가둬두려 했다. 그가 새장 밖에 있었더라면 ‘북한 민주화 운동’은 한반도 역사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쯤 북한 체제의 운명도 달라져 있을지 모른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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