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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추억

중앙선데이 2010.10.17 05:17 188호 31면 지면보기
1995년엔 이런 일들이 있었다.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가 열렸고, 서울 광화문에선 옛 총독부 건물이 철거됐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각각 반란수괴와 비리 혐의로 구속됐다. 부산 국제시장이 불탔고, 대구 지하철 공사현장에선 도시가스가 폭발했다. 서울에선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일본 고베에선 대지진이 일어났고, 도쿄에선 오움진리교가 지하철에 살인가스를 살포했다.

On Sunday

이것 말고도 수도 없는 사건사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해에 난 고3이었다. 하루의 대부분 시간이 잠실종합운동장이 멀지 않은 어느 여고의 고3교실에서 흘러갔다.

역사적으로, 개인적으로 기억될 만한 95년, 정작 내게 가장 강렬한 기억은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이다.

프로야구가 최초로 관중 500만 명을 넘어서면서 최고 인기를 누리던 그때, 여고에도 바람은 불었다. LG 트윈스의 김재현·서용빈·유지현 트리오를 사모하던 여고생들은 툭하면 ‘야자(야간자율학습)’를 땡땡이 치고 잠실로 달려갔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은 운동장 밖을 서성댔다. 7회가 돼야 공짜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한껏 달아오른 경기 후반, 공짜 야구는 때때로 막판 역전극으로 이어졌다. 짜릿했다.

LG를 쫓아다니던 여학생들의 담임은 지독한 OB 팬이었다. 중계해 주지 않는 OB의 경기는 전화로 ‘볼’ 정도였다. 700-XXX-XXXX와 수시로 통화하면서 스코어를 확인했다. 심지어 우리 반 모두를 잠실구장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합법적으로 ‘야자’를 제치고 OB 경기가 열리는 구장으로 현장학습을 갔다. 야구 팬이거나 말거나, OB를 응원하거나 말거나 푸른 그라운드처럼 고3의 가슴이 탁 트였다.

마침내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OB가 우승했다. 82년 프로야구 원년 우승 이후 13년 만이었다. 담임은 수능을 꼭 한 달 앞둔 우리들에게 잔치를 열어 줬다.

하지만 추억은 여기까지. 95년 540만 명을 찍은 프로야구는 시들었다. 96년 449만, 97년 390만, 98년 263만 명…. 96년은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첫 승을 거둔 해였다. 유망주들은 죄다 미국으로 나갔고 팬들은 밤을 새우며 메이저리그만 봤다. 잊혀진 야구가 돌아온 건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은 예선 6전 전승을 거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선 금메달을 땄고, 2009년 제2회 WBC에선 준우승을 했다. 박찬호·이승엽도 뛰었지만 히어로는 이범호·김태균·이진영·류현진 등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이었다. 이때부터 야구장엔 관객이 매년 100만 명씩 늘었다.

출범 29년, 부침을 겪은 끝에 한국 프로야구가 부활한 이유는 국제 경쟁력이다. 국가 대항전에 해외파를 끌어모아 관중몰이를 하지만 정작 국내 리그는 썰렁한 다른 종목과의 차이다. 롯데와 두산, 두산과 삼성이 펼친 포스트시즌을 보면서 15년 전 느꼈던 야구의 짜릿함을 다시 맛봤다. 응원하는 팀이라서가 아니라 메이저리그 부럽지 않은 경기력으로 팽팽한 접전을 벌인 명승부 덕이었다. 한국 프로야구는 실력으로, ‘한국 프로야구’ 자체로 사랑받게 됐다.

SK 와이번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 프로야구 스물아홉 번째 우승팀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다. 가을은 야구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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