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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ocus] 사재 500억원 영화계 기부, 멋진 영화인 신영균

중앙일보 2010.10.16 00:06 주말섹션 6면 지면보기
눈빛이 밝고 혈색이 좋았다. 여든둘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젊은 인상. 서울 명동의 사무실에서 신영균 전 예총 회장을 만났다. 최근 사재 500억원을 기부해 한창 주목받는 그다. 53년 역사의 명보극장과 국내 최초·최대의 영화박물관 신영영화박물관을 쾌척한 그에게 “멋진 노년의 결단”이라는 찬사가 잇따른다. “기부문화의 횃불을 들었다고 칭찬해 주는 사람도 있더라”며 그는 웃었다. 탁자 위에는 딸·아들과 찍은 옛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가족적인 면모가 느껴졌다. “일만큼 가정이 중요했고, 배우지만 가정을 잘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은희 김지미 윤정희 문희 … 가장 예쁜 사람은 아내죠”

글=양성희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사진을 찍는 건지 몰라서 타이도 안 매고 대충 입었다”는 흰 셔츠에 검은 재킷이 젊은 패셔니스타 뺨쳤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평생 그의 매니저 겸 스타일리스트 역할 등을 도맡아 온 부인 김선희(76)씨에게다. 잠시 후 김씨가 셔츠 몇 벌을 챙겨들고 나타났다. 익숙한 포즈였다. 기자가 “지난 기자회견 때 ‘치과의사라 결혼했지 딴따라 될 줄 알았으면 안 했다’고 말씀하셨잖아요”라며 농 비슷하게 말을 건네자 “내가 말 잘못한 것 같아요. 딴따라여서 결혼한 건데”라며 활짝 웃었다. 신씨는 인터뷰 내내 아내와 가족의 의미를 강조했다. 치과의사 출신에 배우, 정치인(15~16대 국회의원), 예술행정가를 두루 거친 그의 현 직함은 한나라당 상임고문, 제주방송 명예회장 등이다. 거기에 애처가를 추가해도 좋을 것 같았다.



● 기부의 반향이 아주 큽니다.



 “발표하고 나서 전화 많이 받았어요. 축하한다, 존경한다, 이렇게 격려해 줘서 행복감 느끼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기부란 게 그래요. 남을 위한 배려인데 자기가 더 만족스럽고 행복해지는 거죠.”

● 기부 생각은 몇 년 전부터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결혼 50주년이던 2006년 금혼식이 계기가 됐지요. 4~5일 전에 갑자기 없는 사람들과 밥 한 그릇 나누는 게 더 큰 보람 아닌가 싶어져 식을 취소하고 1억원을 언론사에 기부했어요. 그때부터 기부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게 됐지. 물론 그동안 영화인 자녀들을 위한 장학금 등은 틈틈이 내왔지요.”



● 명보극장은 남다른 의미의 건물 아닙니까?



 “의미 있는 걸 내놔야 진짜 의미 있는 일이지. 명보극장은 내 꿈이었어요. 배우 신영균의 모든 것이기도 하고. 77년 인수했으니 올해로 33년이네요. 배우가 극장을 인수하는 일이 없어서 그때부터 김수용 감독이 날 ‘신재벌’이라고 불렀고 별명이 돼버렸지. 영화계에 돈 많은 사람으로 소문나고, 돈 많은데 커피 한잔 안 산다, 인색하다, 짜다, 이런 말도 듣고. 원래 우리가 명보극장에 붙어 있던 명보제과를 했어요. 난 배우일수록 노후 대비하고 경제적인 것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제과점도 시작한 거예요. 5층에 빵공장이 있고, 3층엔 우리 살림집이 있었지. 이대 정외과 나와서 제빵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집사람이 맡아 하느라 애 많이 썼어요. 내 스케줄 잡고, 계약 챙기고, 의상 준비에 내 건강 관리하랴, 거기에 제과점까지. 한번은 쓰러져 수술을 받기도 했지. 그 시절 애쓰고 고생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해요.”



● 사모님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



 “내가 잘되고, 노후에 이만큼 좋은 일 하게 된 것도 다 집사람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영화배우로 살면 유혹이 좀 많아요. 잘나갈 때 흥청망청하고 가정 소홀히 했다가 말로가 비참한 선배 배우들을 많이 봤어요. 집사람이 제 생활의 뒷받침을 많이 해줬죠. 제 인생철학이 그래요. 검약하자, 가정이 제일 중요하다, 경제관념을 철저히 하자. 이북(황해도 평산) 사람이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어머니와 살면서 힘들었지. 저절로 생활력이 강해졌어요. 아이들한테도 딴따라 자식이니 방탕하다, 공부 못한다, 이런 말 안 듣게 엄격하게 했어요. 신앙의 힘도 컸죠. 어머니가 권사고 모태신앙인데, 그래서 담배 안 피우고 술도 아주 조금만 해요. 영화 찍을 때 담배 피우는 장면은 어색해서 혼났지.”(웃음)



● 인기스타이시니 극성 팬도 많으셨을 텐데요. 회장님 때문에 자살한 홍콩 여배우가 있었단 얘기도 있고요.



 “며칠 전 사무실 앞에서 60대 여성이 팬이라면서 반가워해요. 여기 계신 것 알면 찾아올 팬이 많을 거라면서.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나 때문에 이혼한 여성이 있다고도 하데요. 어디선가 내 손을 한번 잡았는데 남편이 그걸 용서 못해서 싸우고 별거하고 나중엔 이혼하고 미국을 갔다나요. 참…. 아, 그 홍콩 배우는 ‘달기’란 한·홍 합작영화에 같이 출연한 린다이인데, 당시 홍콩 최고의 미녀였죠. 날 좋아했는데 주변에서 얼마나 부추기는지. 부인 있다고 하는데도, 부인이 둘이면 어떠냐면서…. 다, 옛날 얘기지.”



● 데뷔가 1960년, 은퇴가 1978년. 297편에 출연하셨지만 배우 활동은 그리 길지 않으셨습니다.



 “아, 내가 은퇴하고 싶어서 은퇴한 게 아니고 당시엔 영화검열이 아주 심해서 제작도 줄고, 맘에 드는 작품도 없어서 그냥 쉬다 보니까 자연스레 은퇴가 돼버렸어요. 사업 바빠지고 공백이 길어지면서.”



● 그럼 연기에 대한 열정이 아직 있으시겠네요.



 “그럼요. 내가 스펜서 트레이시 주연의 ‘노인과 바다’ 같은 영화를 딱 한 편 제주 바다에서 찍어보고 죽고 싶네요. 요즘 배우들 보면 부러워요. 위상도 격상되고,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우리 땐 전쟁영화 찍으면 실탄을 쏘고 했거든. ‘빨간 마후라’ 때는 조종간 유리창에 총알이 박히는 장면을 찍느라 10m 뒤에서 실탄을 쐈어요. 일등 사격수라지만 식은땀을 흘렸지. ‘5인의 해병’ 때도 해병 전투 장면이 전부 실탄 사격이야. ‘연산군’ 때는 말 타는 장면을 찍는데 훈련된 말이 아니라 경마장 말을 빌려다 쓰니까 한 번 뛰기 시작하면 제동이 안 걸려, 큰 사고 고비를 여러 번 넘겼어요. 야외 세트장 가면 겨울인데도 히터가 없어서, 여름 장면을 찍는데 입에서 입김이 나와요. 얼음을 물고 있다가 뱉자마자 대사를 하고. 촬영장 오갈 때 지프를 개조한 승용차를 타고 다녔는데 역시 히터가 없으니까 차 안에 석유난로를 싣고 다녔다면 믿겠어요?”



● 원래는 연극배우 지망생이셨죠?



 “고교(한성고) 연극반이었는데 연기가 너무 좋아 대학도 안 갈 생각이었어요. 실제 고교 졸업 후 2년간 연극단체를 따라다녔죠. 근데 생활이 너무 비참한 거라. 겨울에 대전에서 부산으로 이동하는데 트럭 뒤에 세트를 싣고 배우들도 거기에 타요. 나야 총각이니 괜찮지만 가장이 되면 이렇게 살 수 없겠다 싶었지. 그래서 대학(서울대 치대)을 가고 치과의사가 됐어요. 그래도 연극에 대한 끼를 못 숨기겠는 거라. 다시 연극을 시작했고, 조긍하 감독의 눈에 띄어 영화 ‘과부’로 데뷔했죠. 참, 내가 치과 할 때 경기여고 다니던 김혜자가 환자였어요. 나중에 만나니까 ‘원장님이 웬일이세요’ 그러데요.”(웃음)



● 사극·액션·멜로·문예영화 등을 두루 하셨는데 가장 애착이 가는 장르가 있다면요.



 “가장 나한테 맞은 장르는 사극이에요. 내가 연극 출신인데, 연극이 액션이 크잖아요. 근데 옛날 영화들은 클로즈업이 많아서 액션이 크면 그게 다 오버가 돼요. 그런데 사극은 액션을 크게 해도 되고 ‘연산군’의 신상옥 감독님 같은 분은 나한테 모든 걸 맡겨, 카메라가 그냥 알아서 나를 따라와, 참 편하게 연기했죠. 개인적으로는 상을 받은 영화들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빨간 마후라’ ‘상록수’ ‘연산군’. ‘미워도 다시 한번’은 내 영화 중 제일 손님이 많이 들었죠. 감독으로는 신상옥 감독님 작품을 제일 많이 했고, 최고의 파트너였죠.”



● 가장 기억에 남는 상대 여배우를 꼽으신다면.



 “최은희·김지미·윤정희·고은아·문희·전계현·김혜정…. 웬만한 배우는 다 해봤는데, 특별히 누구를 꼽으라고 하지 마요. 그분들 삐집니다. 단, 내가 집사람한테는 항상 말해요. 대한민국에서 예쁘다는 배우들하고 다 해봤지만, 내 눈엔 당신이 제일 예쁘다고요.”



● 후배 영화인들과는 자주 교류하시나요.



 “우리 영화계가 선후배 간 교류가 너무 없고, 선배나 원로에 대한 대접이 소홀해 많이 안타까워요. 3년 전부터 원로배우 30~40명과 식사모임을 갖는데, 젊은 배우들도 가끔 와서 인사도 하고 따뜻한 말 나눴으면 좋겠다 하는데도 통 오는 이들이 없어요. 게다가 요즘 영화계는 진보·보수로 갈리고, 영화인이 무슨 정치가도 아니고, 영화 아래 하나로 뭉쳐야 할 텐데, 씁쓸하죠.”



● 영화계의 소문난 자산가신데요, 돈에 대한 철학이 궁금합니다.



 “명보극장이 내 전체 재산의 40%쯤 돼요. 돈은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기를 잘 써야 돼. 좋은 데 쓰면 행복하고, 그만큼 보상이 꼭 있어요. 미국이 세계 강국이고 잘되는 것도 빌 게이츠 같은 부호들이 기부하고 돈을 잘 쓰기 때문 아니겠어요. 기부문화 정착에 내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번 결정에 제 아들인 신언식 회장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영화배우로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 아니겠냐며 먼저 아이디어를 냈어요. 아버지를 영예롭게 해준 효자죠. 명보극장은 단지 제 소유물이 아니라 충무로와 한국영화의 상징이니까 그걸 지킬 수 있어서 저도 참 기쁩니다.”






j 칵테일 >> 한국 영화계의 보물, 명보극장









1990년의 ‘명보극장’.



서울 중구 초동의 명보극장이 처음 개관한 것은 1957년 8월. 건축가 김중업의 설계였다. 광화문 국제극장과 경쟁관계였다. 비슷한 규모에 국제극장 전속 홍성기 감독(당시 김지미의 남편), 명보극장 전속 신상옥 감독이 경합하는 구도였다. 1961년 홍성기 감독, 김지미 주연의 ‘춘향전’과 신상옥 감독, 최은희 주연의 ‘성춘향’이 열흘 차이로 두 극장에서 개봉했던 것은 한국영화사에 남는 사건이었다.



신영균 회장이 명보극장을 인수한 것은 1977년. 당시 서울에는 봉절관(개봉관)이 10곳밖에 없어 1년에 150~200편씩 쏟아지는 영화들의 극장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설이나 추석, 크리스마스 같은 ‘대목’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시 신 회장은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라는 영화를 배우 김희갑씨와 공동 제작했는데, 국도극장을 잡는 과정에서 김씨가 ‘무리수’를 범해 문제가 생겼다. 이 뒷수습을 하면서 “극장을 갖고 싶다는 욕심이 커졌다”고 회상했다.



 신 회장의 명보극장에서는 화제작 ‘지옥의 묵시록’ ‘빠삐용’이 잇따라 개봉했다. 78~80년 한국영화 ‘내가 버린 여자’ ‘속 별들의 고향’ ‘미워도 다시 한번 80’으로는 3년 연속 한국영화 최다 관객 동원 기록도 세웠다. 87년 국내 극장으로는 최초로, 조지 루커스가 개발한 음향시스템 THX를 들여와 극장 현대화를 선도했다.



 94년에는 멀티플렉스 명보플라자로 재출발했다. ‘예술의전당’을 설계한 김석철씨가 처음 극장 설계에 손을 댔다. 이후 명보극장으로 돌아왔다가 최근에는 복합공연장인 명보아트홀로 변신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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