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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의 시시각각] 버스 안에서 쓴 자서전

중앙일보 2010.10.14 20:38 종합 38면 지면보기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쑥스럽지만 나뭇잎 몇 개를 책갈피에 끼워 넣어 챙겨왔다. 사춘기 시절에도 안 하던 짓이었다. 지난주 러시아는 가을이 막바지였다. 낙엽 두 개는 『귀여운 여인』 『갈매기』를 쓴 체호프 집에서, 나머지 네댓 개는 페레젤키노 작가촌에 있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박물관 정원에서 주웠다. 파스테르나크가 『의사 지바고』를 마무리하고 세상을 뜬 곳이다. 가져올 수 없었던 무수한 자작나무들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서 바람에 부대끼고 있다.



 한·러 수교 20주년을 기념한 ‘이문열과 함께하는 러시아 문학기행’에 낀 것은 행운이었다. 문호 톨스토이의 광활한 영지(領地) 야스나야폴랴나. 생가에서 불과 수백m 떨어진 그의 무덤은 방문객들을 숙연하게 했다. 관 모양의 작은 봉분 외엔 그 흔한 묘비도 기념비도, 아무것도 없었다. 톨스토이가 저택에 남긴 39개 언어 2만3000여 권의 장서 중에는 일본 작가 도쿠토미 겐지로의 『불여귀(不如歸)』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쇠잔해가던 조선의 책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많은 방 중에는 젊은 시절 방탕했던 톨스토이가 하녀의 꽁무니를 뒤쫓던 곳도 있을 것이다. 꼭 100년 전인 1910년 10월 27일 밤, 82세의 톨스토이는 부인 소피아가 잠들기를 기다려 ‘가출’을 감행한다. 유독 아꼈던 넷째 딸 사샤만 깨워 가출을 귀띔하고 마차에 올랐다. 그러나 폐렴에 걸려 11월 7일 아스타포보역(톨스토이역)에서 숨을 거둔다.



 현장(現場)이 주는 감동은 역사에서도,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톨스토이 생가에 이어 『전쟁과 평화』의 무대인 보르디노 평원에 가는 길이었다. 40여 명의 문학기행 참가자들이 버스 안에서 각자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듣다 보니 의례적인 “알고나 지내자” 수준이 아니었다. 이문열이라는 한국 문학의 거장(巨匠)이 함께하는 여행이라 선뜻 나섰다는 점은 다들 같았다. 그러나 지나온 길은 제각각이었다. 톨스토이의 초라한 무덤이 준 충격 때문일까. 진지하게 털어놓은 얘기들은 그 자체가 아무런 가식이 없는 ‘자서전’이었다.



 60대 후반의 은퇴한 직업외교관의 부인. “미대를 나왔지만 남편과 결혼하고 나서는 해외 공관을 돌며, 내가 학창 시절 제일 싫어하던 외국어 공부에 시달리며 살았다. 수많은 손님을 치르는 등 엄청나게 일했고, 나를 완전히 죽이고 살았다”고 담담히 고백했다. ‘대사 부인’의 중압감에서 벗어난 그녀는 자서전 말미에 “그동안 포기했었는데, 이제는 여자이고 싶습니다!”라고 외쳤다. 모두 가슴이 뜨거워져 박수를 쳤다. 50대 중반 출판사 대표의 자서전은 가히 대하소설감이었다. “고교 시절 아버지의 병환으로 집안을 이끌게 됐다. 서울 명동의 튀김골목에서 국내 최초로 명화·사진을 ‘판넬’로 만들어 파는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가 엄청나게 잘돼 집 한 채를 살 정도였다. 그러나 곧 돈이 새나가서 이번엔 출판사 영업직으로 전집 판매를 시작했다. 판매량에서 국내 정상에 오를 정도로 노력했다. 장사 잘하려면 책 내용도 알아야 하기에 참 많이 읽었다. 이문열 선생님 작품도 그때 거의 섭렵했다. 그러다 또 망하고, 다시 일어서고….”



 “80세 넘은 어머니가 홀로 계신데, ‘네 아버지 방에 옛날 처음 들어갔을 때 벽에 걸린 커다란 톨스토이 사진이 참 인상적이었다’는 말씀을 자주 했다. 이번 여행길에 똑같은 사진을 꼭 구해 드리겠다고 약속했다”는 50대 여성, 지난해 ‘세계문학전집 대장정’을 시작해 지금까지 40권을 독파했다는 대학 교수…. 나는 누가 감히 우리나라에서 문학이 죽었다고 섣부르게 떠드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감동은 톨스토이 생가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 눈이 어두워 그렇지, 대한민국의 웬만한 남성·여성 한 명 한 명이 다 감동거리 아닌가. 다 자서전 출판감 아닌가. ‘버스 안의 자서전’을 들으며 그동안 내 주변에서 살아 숨쉬었을 수많은 ‘감동’을 모르고 지나친 게 새삼 부끄러웠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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