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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광부 69일 만에 생환] ‘700m 땅속 69일’ 의 재구성

중앙일보 2010.10.14 01:44 종합 3면 지면보기
기적이란 희망의 또 다른 이름과 다름없다. 69일간의 사투 끝에 영영 못 볼 것만 같았던 지구 표면을 다시 밟은 33명의 칠레 광부가 입증해 보인, 보석처럼 빛나는 진리다. 천길 나락에 떨어져 갇힌 가운데서도 광부들은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고, “살 수 있다”는 믿음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끈끈한 동료애를 발휘했다. 극한의 상황을 다잡고 33명의 ‘나’를 ‘우리’로 조율해 낸 리더십도 빛이 났다.


33명의 ‘나’를 버리고 ‘우리’로 뭉쳤다 … 그래서 살았다

구조전문가 마누엘 곤살레스(왼쪽에서 둘째)가 12일 밤(현지시간) 캡슐을 타고 지하로 내려가 광부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코피아포 AP=연합뉴스]
8월 5일 오후 8시 반쯤(현지시간) 칠레 북부 산호세 광산에서 갑자기 갱도가 무너져 내려 그들은 700m 땅 밑에 갇혔다. 구조의 손길이 언제 올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 밀폐된 공간 속에서 그들은 본능적 공포와 싸워야 했다. 더구나 물과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지하공간은 섭씨 33도에 이르는 고온에 습도가 90%를 오르내리는 극한의 세계였다. 두 번째로 구조돼 나온 마리오 세풀베다가 “신과 악마와 함께 있었다”고 한 말처럼 그들은 생과 사의 기로에 섰다. 다행히도 산호세 광산은 금·구리 광산이어서 탄광에서와 같은 메탄가스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광부들은 규율과 절제 있는 생활태도를 유지했다. 비상식량을 아끼기 위해 48시간마다 참치 두 숟갈과 우유 반 컵을 마시는 것으로 버티면서 구조대를 기다렸다. 자연광과의 고립으로 인해 생체시계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규칙적인 생활리듬을 지켰고 하루를 12시간으로 쪼개 2교대로 활동했다.



최연장자 마리오 고메스(63)의 경험과 축구코치 경력이 있는 작업반장 루이스 우르수아(54)의 지휘가 기약 없는 지하생활을 이끌어 나갔다. 고메스는 19세 어린 광부를 다독이는 한편 3인 1조로 역할을 분담하고 불침번까지 운영했다. 각자 경력과 특기를 살려 간호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광부는 동료들의 건강을 돌봤고, ‘오락반장’ 역할을 맡아 동료들의 심리적 안정을 이끌어 낸 사람도 있었다. 지하 갱도에 ‘작은 사회’가 구성된 것이다. 구조에 대비해 지하 갱도의 지도를 그리는 등 정보 수집 활동도 빠뜨리지 않았다. 우르수아는 구조 순서를 짤 때도 아픈 사람을 먼저 내보내고 자신의 순서는 마지막으로 미루는 희생정신을 보이기도 했다. 평소 위험한 작업을 함께하는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규율과 동료애가 광부들을 하나로 묶어 줬다. 남미인 특유의 낙천적 기질도 광부들이 희망을 잃지 않는 원천이 됐다.



사고 발생 후 17일째, 구조대의 드릴 끝이 육중한 암반을 뚫고 들어왔다. 그들은 부랴부랴 쪽지에 메모를 써 매달았다. “33명, 전원 무사.” 생존자가 있으리란 확률이 점차 희박해져 가던 무렵 일어난 기적이었다. 칠레 구조대는 우선 암반에 구멍을 뚫고 ‘팔로마(비둘기)’라고 이름 붙여진 지름 12㎝의 캡슐에 물과 음식, 의약품과 옷가지 등 생필품을 내려보냈다.



가족과 광부들 간의 편지 교환도 이뤄졌고, 화상 카메라까지 들여보냄으로써 그들은 외부와의 격리 상태에서 벗어났다. 광부들의 생존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지자 애플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는 아이팟을 전달했고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묵주를 보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구조작업에 노하우와 장비, 우주인들이 먹는 특수 고칼로리의 비상식량 등을 제공했다. 광부들은 가족과 화상전화를 하고 반입된 소형 프로젝터로 축구 경기를 관람하면서 불안감을 달래는 한편 규칙적인 운동으로 건강을 지켜 나갔다.



구조 D-데이인 13일 광부들은 ‘희망’이라 이름 지어진 캠프에서 내려보낸 구조용 캡슐 ‘페닉스(불사조)’를 타고 귀환했다. 69일 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밝고 건강한 표정으로 나타나 전 세계인이 자신들에게 보낸 격려와 기대에 보답했다. 절망적인 극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진짜 불사조가 돼 나타난 광부들에게 지구촌은 박수를 보냈다. 그사이 태어난 매몰 광부 에리얼 티모나의 딸에겐 ‘에스페란사’(희망이란 뜻)란 이름이 붙여졌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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