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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2) 2군단 창설식

중앙일보 2010.10.14 01:13 종합 12면 지면보기
현대전 수행능력을 갖춘 2군단의 창설로 국군은 면모를 일신했다. 사진은 군단 창설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이 기념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백선엽 장군 제공]
새로 창설한 국군 2군단의 예하에는 그 전까지 미 9군단에 배속돼 있던 국군 3사단(사단장 백남권 준장)과 6사단(사단장 백인엽 준장), 그리고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일원으로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에 나섰던 역전의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 준장)이 배속됐다. 좌익에 6사단, 우익에는 3사단, 중앙에는 수도사단이 자리를 잡았다.


2군단 창설 때 이승만은 비장했다
“국군 면모 일신, 오랑캐 무찌르자”
155마일 전선 한가운데를 맡아
국군 단독으로 중공군 깨야 했다

이로써 2군단은 동해안의 1군단에 이어 전선의 일부를 담당하는 두 번째의 한국군 군단이 됐다. 동해안의 1군단도 나름대로 중요한 부대이기는 했으나, 국군 2군단의 창설과 전선 담당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우리가 담당한 전선은 ‘155마일’의 전선 중 가운데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여기가 뚫리면 춘천과 원주가 곧바로 위험에 빠지게 된다. 중동부 전선의 핵심 지역이어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더구나 전선 전면에는 중공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단독으로 맞붙었을 때 좀체 상대하기 어려웠던 대상이 중공군이었다. 그들은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았을 뿐만 아니라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에 이어 대륙을 침략한 일본군을 상대로 실전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동해안의 국군 1군단 전면에 있던 적은 북한군이 주력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중공군과 전선을 두고 직접 대적(對敵)하는 국군 군단으로 자리를 잡은 셈이었으니 그 의미가 작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화천 북방을 담당하는 부대로서 자리를 잡음에 따라 당시 미 8군이 지휘하는 전선 방어 부대는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미 1군단, 미 9군단, 국군 2군단, 미 10군단, 국군 1군단이 늘어서게 됐다. 동해안의 비교적 작은 작전지역을 국군 1군단이 담당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국군 2군단이 미군 군단의 중간에 끼어 전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를 테면 미 군단과 함께 동등한 자격으로 전선 방어에 투입된 셈이다. <그래픽 참조>





2군단 예비로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이 보낸 미군 부대는 7사단의 21연대였다. 한국의 우방으로서 참전했던 태국군 1개 대대도 함께 왔다. 태국 부대는 화천댐 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 태국 대대를 이끌고 온 사람인 크리앙사크 초마난(1917~2003) 중령이었다. 크리앙사크는 1977년 11월부터 80년 3월까지 태국 총리를 지냈다.



그렇게 2군단은 당당하게 새로운 개념의 국군 군단으로서 전선의 한 축을 떠받치는 자리에 올랐다. 앞으로 ‘우리 땅은 우리 스스로 지킨다’는 원칙을 이뤄 나가는 데 2군단 재창설과 전선 투입은 그 첫걸음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 모든 배경에는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있었다. 내가 감히 증언(證言)하자면, 무기와 시스템의 현대화 작업을 통해 국군이 강력한 군대로 일어설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을 소탕하는 거대한 규모의 작전을 구상했고, 나를 그 지휘관으로 임명해 작전을 수행토록 한 사람이다. 이어 광주 포병학교를 창설해 체계적인 한국군 포병 현대화 작업의 실마리를 마련했고, 그 중요한 시험대로서 2군단을 다시 만들었다. 만약 밴플리트 사령관이 아니었다면 그런 일련의 한국군 강화 작업은 훨씬 나중에 겨우 실현됐거나, 아예 펼쳐지지도 못한 채 끝날 수도 있었다.



그는 한국군 증강 작업을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라면서 밀어붙였고, 미국 수뇌부도 그의 의지에 손을 들어줬다. 그만큼 그는 한국과 한국군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아주 가까웠다. 그런 밴플리트 사령관을 이 대통령 또한 끔찍이 아끼고 믿었다. 그런 긴밀한 협조 관계를 통해 현대전을 단독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국군 2군단도 순조롭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군단 창설식에서 미 9군단 와이먼 소장(앞줄 왼쪽에서 둘째)이 백선엽 신임 2군단장에게 군단 깃발을 건네는 장면이다. [백선엽 장군 제공]
그 두 사람이 52년 4월 5일 화천 북방의 소토고미 상공에 나타났다. 군단 창설식에 참석하기 위해 밴플리트 장군이 이 대통령을 수행해 날아온 것이다. 소토고미의 비행장은 경비행기용이어서 요인들은 2인승인 L19를 한 대씩 타고 왔다. 밴플리트 장군이 먼저 내려 이 대통령을 기다렸다. 이어 이 대통령을 태운 비행기도 착륙했다. 나는 힘차게 이승만 대통령에게 거수경례를 올렸고, 이 대통령은 흐뭇하고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런 우리를 바라봤다.



창설식은 소토고미의 경비행장에서 바로 열렸다. 신태영 국방장관과 이종찬 육군참모총장, 존 오다니엘 미 1군단장, 윌리스턴 파머 미 10군단장 등 요인들도 참석했다. 2군단에 앞서 이 지역을 방어했던 와이먼 미 9군단장이 내게 군단 깃발을 만들어 전했다. 군단 마크는 국군 2군단이 미 9군단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미 9군단 마크의 색깔을 바탕으로 로마자 ‘Ⅱ’를 넣은 도안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얼굴이 조금 움직였다. 끓어오르는 감격을 애써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대한민국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개념의 강력한 군단을 보유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을 다른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이 대통령은 기념 식사에서 “이제 국군의 면모가 일신(一新)됐다. 이제 국군은 인적, 물적으로 싸울 수 있게 됐다. 오랑캐를 무찌르고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오로지 북진통일을 강조하는 이 대통령, 그런 대통령의 신념이 공허한 염불로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갖춰야 하는 강력한 군사력, 그리고 그 첫걸음으로서의 2군단 창설이라는 의미가 겹쳐지면서 행사장에는 비장감이 넘쳤다.



밴플리트 사령관도 역시 기쁜 표정으로 행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단정한 자세를 유지하는 모습이 늘 그가 보여주던 그 모습대로였다. 그러나 내가 언뜻 바라본 그의 얼굴에는 평소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흘러 다니고 있었다. 약간 기운이 빠져 있는 듯한 기색도 보였다. 말수도 적은 편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 밴플리트 장군은 곁에 다가선 내게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아주 슬픈 소식을 전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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