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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반체제’ 대자보 붙이고 내용을 전파한 사람들(Ⅱ)

중앙일보 2010.10.14 00:59 종합 37면 지면보기
 
  18세기 중엽에 그려진 『海東地圖(해동지도)』속의 하동부(河東府) 지도. 하동은 진주·의령 등 경상우도는 물론 섬진강을 통해 호남과도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다. 섬진강변에 두치진(豆恥津)이란 나루터가표시되어 있는데, 괘서가 나붙었던 두치장터 또한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본래 괘서를 써서 붙이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였다. 정양선은 당연히 이진화의 진술 내용을 부인했다. 그는 ‘十爭一口(십쟁일구)’를 해석했던 사실만 인정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부인했다. 수차례 대질을 시켰음에도 양자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자 경상감영은 수사의 방향을 다시 바꾼다. 그 과정에서 이호춘(李好春)이란 서당 훈장이 주목되었다. 그는 발언을 유도하기 위해 접근한 수사관에게 “오늘날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세상이 뒤집어져야 한다” “천한 사람이 귀하게 될 수 있다”는 등 ‘엄청난’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이제 이호춘을 하동 괘서의 범인으로 몰아가면서 수사는 의령과 창원 사건에 집중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의령과 창원의 괘서는 전지효(田志孝)라는 사람이 자신의 처남인 이진화와 배윤경(裵綸慶) 등을 사주하여 부착했다는 것이다. 막근동의 유지였던 전지효는 괘서를 신고하면 상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몹시 가난했던 두 처남은 상을 받으면 생활이 좀 펴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다. 전말은 전지효와 이진화의 대화 내용을 엿들었던 형리 표명두(表命斗)의 증언을 통해 드러났다.

하동 사건의 주범으로 몰릴 뻔했던 정양선과 주변 인물들의 행적도 흥미롭다. 재산은 제법 있지만 지방의 진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정양선은 평소 세상에 불만이 많았다. 그는 사랑방에서 자신의 소작 농민들에게 ‘十爭一口’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주었다. 그 자리에서는 또 다른 훈장 이방실(李邦實)도 함께 거들었다. 사랑방에 갔던 빈농 정철손(鄭哲孫)은 “10월 21일에 변란이 일어난다”는 내용을 진주 인근의 농촌에 전파했다. 소문을 들은 또 다른 빈농 강응일(姜膺一)은 변란이 진짜 일어날 것으로 믿고 강원도 산골로 피란 가려고 시도한다.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은 가혹했다. 이호춘은 ‘체제 전복’을 꾀하고 민심을 선동한 혐의로, 전지효는 괘서를 사주한 혐의로, 이진화와 배윤경은 부착한 혐의로, 표명두는 애초 두 사람의 대화를 알리지 않은 ‘불고지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정양선·이방실·정철손은 유언비어의 생산과 전파 혐의로 유배되었다. 강응일 또한 ‘경거망동’ 혐의로 곤장을 맞아야 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조선 곳곳에서는 ‘어렵고’ ‘아픈’ 사람들로부터 갖가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밑으로부터의 언로(言路)가 막힌 상황에서 괘서는 그 신음 소리를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위정자들은 그 소리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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