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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이 알아봤다 ‘작곡 여걸’진은숙

중앙일보 2010.10.14 00:21 종합 32면 지면보기
가히 ‘진은숙의 계절’이다. 우선 지난달 28일 지중해의 모나코에서 낭보가 날아왔다. ‘피에르 대공 작곡상’ 수상.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남편인 레니에 3세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만든 현대음악 작곡상이다. 볼프강 림·죄르지 쿠르탁 등 현대음악 거장들이 역대 수상자다. 이틀 뒤, 런던발 뉴스가 도착했다. 영국 명문악단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현대음악 디렉터로 진씨가 임명됐다. 비(非) 영국계 작곡가로는 처음이다.


피에르 대공 작곡상 … 영국 ‘필하모니아’ 현대음악 감독 …

작곡가 진은숙(49)씨는 한국의 ‘문제작’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독일에서 공부한 이래 유럽에서 터를 잡았다. 사이먼 래틀(베를린 필하모닉)·켄트 나가노(몬트리올 심포니)·구스타보 두다멜(LA 필하모닉) 등이 그의 신작을 지휘한다. 베를린·뮌헨·뉴욕, 세계의 음악 중심이 그의 무대다.



# “귀족이고 왕이고, 우습다”



작곡가 진은숙씨는 화통하고 도발적이다. “자기하고 싸워 음악의 희열을 맛본 사람은 세상에 두려운게 없다. 예술가는 멀리 보고 홀로 길을 가야 한다”고 했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13일 서울에서 만난 진씨. 금의환향 치곤 일성이 뜻밖이다. “상 받고 다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곡 쓸 시간이 충분해야 되는데 말이에요.”



그는 “요즘 불면증으로 거의 한 숨도 못 잔다”고 했다. 창작 의뢰를 받은 작품이 2017년까지 대기 중이다. 수상의 기쁨을 누릴 틈이 없다. 소위 창작의 고통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아니, 지독한 수도자를 닮았다. “베를린에 살고 있는데, 저희 가족은 차가 없어요. 밖에 나오질 않으니까. 남편이나 아들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날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곡 하나 쓰려면 작업실에 몇 달을 틀어박혀요. 주변 한국인조차 제가 독일에 사는지 모를 정도니까요.”



대신 쉴 새 없이 날아드는 건 각종 초청장이다. ‘세계적 한국 작곡가’가 닉네임이 된 덕이다. “대통령 만찬에 초청한다는 대사관의 초청창? 답장 안 해요. 문화계 유력 인사와 식사 약속? 내년 3월쯤 가능할까…. 예술가가 왜 여기저기 악수하고 다녀야 해요?”



괴짜다. 서울대 음대 재학 시절부터 명물이었다. “한달 내내 학교 빠지고 대리 출석 시켰어요. 곡 쓰느라고요. 82학번인데, 3학년 올라갈 땐 졸업정원제 때문에 잘릴 뻔했어요. 다행히 다른 사람이 잘려줬기에 망정이지.”



무기는 집중력이다. “어떤 작곡가는 버스 타고 가다가도 쓰는데, 저는 그게 안돼요. 미친 사람처럼 곡만 써요. 전 무당 같은 작곡가라 불이 나듯 영감이 떨어지거든요.”



# “남들 코드에 맞출 생각 없어요.”



유럽의 문턱은 높았다. “독일로 유학 가면 학비 공짜에 학생 우대에, 기분 날아갔죠. 근데 거기까지예요. 음악계 핵심부는 철저히 차단됐죠. 제 곡이 독일에서 연주되면 비평가들이 이렇게 쓰죠. ‘동양의 여성 작곡가인데 어디와 어디에서 후원을 받고 있으며….’ 로비로 성공했다는 식이에요.”



때문에 이번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디렉터 임명은 의미가 크다. “영국 등 유럽 중심의 문화를 바꿀 거에요. 아시아 작곡가와 지휘자를 무대에 내놓고, 실력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걸 보여주려 해요.”



그는 동양 음악가의 연대에 관심이 많다. 3년 전 대원음악상 작곡상 상금으로 받은 3000만원을 네 명의 후배에게 쾌척했다. 이들에게 작품을 의뢰해 작곡비 명목으로 상금을 나눠줬다. “말이 좋아 여걸, 여장부지, 사실은 깡패죠. 학교 다닐 때도 남의 말 안 들었고, 지금도 그래요. 어렸을 때도 어머니가 품어주면 홱 돌아서 벽 보고 잤다고 해요.”



진씨는 2006년부터 서울시향 상임작곡가로 있다. 16, 20일 현대음악 시리즈인 ‘아르스 노바’를 선보이고 독일에 돌아간다. 피에르 대공 작곡상 수상작인 ‘구갈론-거리극의 장면들’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내년부터 더 많은 신곡을 빚어낼 작정이다. 실내악 중심의 작은 작품과 두 번째 오페라를 구상 중이다. 즐거운 외신이 이어질 듯싶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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