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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걷게 된 소년 ‘희망’과 포옹하다

중앙일보 2010.10.13 01:04 종합 19면 지면보기
12일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강연을 마친 닉 부이치치(28)가 교통사고를 당해 걷지 못하는 정우혁(12)군을 만나 격려했다. 정군은 “형을 보니 나도 잘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세브란스병원 제공]
12일 낮 12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은명대강당. 무대에 설치된 탁자 위에 닉 부이치치(28)가 서 있었다. 팔다리가 없는 그는 화실에서나 볼 수 있는 토르소(몸체 조각)처럼 보였다. 그가 강연 도중 갑자기 탁자 위에서 앞으로 쓰러졌다. 그러곤 몸을 좌우로 꿈틀거리며 탁자 끝에 놓인 책을 향해 갔다. 그는 책 위에 머리를 대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더니 한번에 몸을 세웠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두 다리 다쳐 낙담했던 정우혁군
사지 없는 호주인 부이치치 만나
“저 형은 당당한데… ” 재활 다짐

“의사는 걷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전 수영도 할 수 있어요. 이 몸으로 4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났고 11만 명 앞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있을지 몰라요. 용기를 내 모퉁이를 돌았기에 전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휠체어에 탄 채 강당 맨 앞에서 강연을 듣고 있던 정우혁(12)군도 힘을 다해 박수를 쳤다. 정군은 “팔다리가 없는 형도 남의 도움 없이 혼자 일어나는데, (팔다리가) 다 있는 나는 물리치료 받는 것도 힘들다고 투정을 부렸다”고 말했다.



정군은 지난 5월 교통사고를 당했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던 중이었다. 교문을 100여m 앞두고 승용차가 정군을 덮쳤다. 정군은 차 밑으로 딸려 들어갔다. 당황한 운전자는 가속페달을 밟았고 정군은 10여m를 끌려갔다. 이날 사고로 정군은 골반과 다리를 크게 다쳤다. 걸을 수도, 혼자 앉을 수도 없게 됐다.



먹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던 아이가 먹으려 들지 않았다. 의사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재활치료 역시 받으려 들지 않았다. 자동차가 다니는 찻길을 건너 옆 병동까지 가야 했기 때문이다. 사고 전 50㎏이 넘게 나갔던 몸무게는 10㎏ 가까이 줄었다. 결국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다. 아버지 정은규(48)씨는 “혼자 앉을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게 어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한참 뛰어놀 나이의 사내아이에겐 얼마나 힘들겠느냐”고 말했다.



그런 정군이 2주 전쯤 병원 복도에서 포스터 한 장을 봤다. 닉 부이치치의 강연 포스터였다. 호주인인 그는 사지 없이 태어났지만 전 세계를 돌며 희망을 전하고 있다. 정군은 2년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부이치치를 본 적이 있다. 정군은 “그때는 몸이 불편한데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형이 대단하다는 느낌만 가졌다. 그런데 이번엔 다리가 없는 형도 걷는데 두 다리가 다 있는 나는 더 잘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12일 강연이 끝난 후 정군은 강당 옆 야외공원에서 부이치치를 따로 만났다. 간호사로부터 정군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조재국(57) 원목실장이 자리를 마련했다.



강연을 마치자마자 공항으로 가 비행기를 타야 하는 부이치치도 시간을 냈다. “더 큰일을 해내려고 사고를 당한 거야. 그걸 믿고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형처럼.” 부이치치의 말에 쑥스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하던 정군이 말했다. “형, 한 번 안아봐도 돼요?” 정군이 팔을 들어 포옹했다. 마치 팔이 없는 부이치치가 정군을 안는 듯한 모습이었다.



정선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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