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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반체제’ 대자보 붙이고 내용을 전파한 사람들(Ⅰ)

중앙일보 2010.10.13 00:28 종합 37면 지면보기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왼쪽)와 통영시 문화동에 서 있는 장승. 장승은 마을이나 사찰 입구 등에 세워져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던 존재였다. 조선 후기에 부착된 괘서 가운데는 장승에 붙여진 것이 특히 많았다. 이진화도 세 번째 괘서를 장승에 붙였다. 사람들 눈에 확 띄었기 때문이었다. (사진=문화재청 홈페이지)
 
1801년(순조 1) 6월 13일, 경남 하동의 두치(斗峙) 장터에 괘서(掛書·대자보)가 나붙었다. 하얀 무명에 한자로 쓴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재주와 능력이 있어도 제대로 하는 일이 없고 실농(失農)한 사람들은 일어나라. 재상이 될 만한 자 재상을 시키고, 장수가 될 만한 자 장수를 시키며, 지모가 있는 자 쓰임을 얻을 것이며, 가난한 자 부유해질 것이며, 두려워하는 자 숨겨줄 것이다”. 밑에는 ‘十爭一口(십쟁일구)’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하동부 관헌들에 의해 괘서는 곧바로 수거되고 구경꾼들은 흩어졌다. 하지만 장이 파한 뒤 귀가하던 사람들은 괘서의 내용을 놓고 수군거렸다. 사람들은 특히 ‘十爭一口’라는 알쏭달쏭한 구절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부심했다.

경상감영은 괘서를 써서 붙인 자를 잡기 위해 수사에 착수했다. 그런데 별 진척 없는 수사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후 하동 주변에서는 괘서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7월 중순에는 의령의 막근동(莫近洞)에서 두 번, 며칠 뒤에는 창원에서 한 번 괘서가 다시 나붙었다. 괘서의 내용 또한 두치 장터 것과 비슷했다.

괘서 사건이 잇따르자 경상감영은 물론 서울의 조정도 바짝 긴장했다. 당시는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막 즉위했던 정권 교체기였다. 조정은 경상감영에 수사를 닦달하는 한편 괘서의 내용이 전파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고 지시했다.

사건의 실마리는 의령 사건을 수사하면서 조금씩 풀린다. 이진화(李震化)라는 소작인이 자신의 지주인 진사 정양선(鄭養善·진주 거주)의 사주를 받아 처가가 있던 막근동에 괘서를 붙였다고 진술한 것이다. 이진화는 정양선이 ‘十爭一口’의 뜻도 해석해 주었다고 했다. 즉 “‘爭’의 윗부분에 있는 ‘爪(조)’는 ‘月(월)’이고 밑에 있는 ‘尹(윤)’은 ‘甲(갑)’이 된다. ‘一’은 ‘口’와 합하면 ‘日(일)’이 되므로 十月甲日에 세상이 뒤집힌다”고 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10월 갑자(甲子) 날에 해당하는 21일에 변란이 일어난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의령에 가서 괘서를 붙이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수사는 정양선과 그 주변 인물들에게 집중되었다. 그 결과 두치장에 갔던 농민들이 지주인 정양선의 집에 모여 ‘十爭一口’의 뜻을 해석하려 했고 거기서 나온 내용을 인근에 전파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장터를 매개로 소문이 생산되고 전파되는 조선시대 시골 사회의 속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계속).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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