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 인생의 책 ② 산악인 엄홍길

중앙일보 2010.10.13 00:22 Week& 5면 지면보기
“살아있는 한 절망하지 않는다.”


"낙오 없이 극한의 남극서 돌아온 탐험대 … 한계 넘는 법 배웠다”

해발 8000m가 넘는 히말라야의 16개 봉우리를 정복한 사람, 끊임없는 도전의 사나이.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꿈을 이뤄낸 엄홍길(상명대 석좌교수) 대장의 가슴에 새겨진 문구다. 그의 길에 함께해온 책에 대한 이야기에 김연정(경기 권선고 2)·김영화(서울 예일여중 3)양이 귀를 기울였다.



최은혜기자

황정옥 기자



2000년 봄, 칸첸중가 등정에 나섰을 때의 일입니다. 이미 두 번의 실패로 동료 2명을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던 산이죠.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내 심정은 참담하기까지 했습니다. 고도 7300m쯤 올라가니 급격히 기후가 나빠졌어요. 빙벽이 우뚝 우뚝 서 있고 사방은 눈밭이었죠.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없는 지경이었어요. 그때 앞서 가던 셰르파(산악 등반 안내인) 한 명이 날아온 얼음조각을 맞고 넘어지는 게 보였어요. 황급히 달려가 보니 그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엄홍길 대장이 평소 자주 찾는다는 도봉산 자락에서 김영화(가운데)·김연정양에게 책 이야기를 들려줬다. [황정옥 기자]
팀원들이 함께 그를 들쳐메고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던 도중 그는 결국 숨을 거뒀습니다. 슬퍼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상황은 악화돼 이제는 팀원이 모두 고립될 처지에 놓였죠. 할 수 없이 시신을 두고 겨우 빠져나온 뒤 일주일이 지나서야 시신을 수습해 올 수 있었습니다.



제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소중한 동료의 목숨까지 잃은 마당에 다시 도전할 것인지, 여기서 포기할 것인지…. 팀원들은 내 결정만 기다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어요. 저는 먼 하늘만 쳐다볼 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죠. 그렇게 사나흘이 지났을까요. 당시 우리팀과 동행한 중앙일보 김세준 레저 전문 기자가 다가와 책 한 권을 내밀었죠. 『살아있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알프레드 랜싱,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로 제목 변경).



첫 장을 넘김과 동시에 책에 빠져들었어요. 단숨에 끝까지 읽어내려 갔죠. 배를 타고 남극 탐험을 떠났다가 난파된 대원들, 그리고 그들을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이끌고 생환한 섀클턴 대장의 이야기예요. 실제로 있었던 일이랍니다.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직면해 왔던 생과 사를 가르는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마음 깊이 공감이 됐어요. 그리고 전율이 느껴졌어요.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이야기 속 대원들의 상황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책장을 덮고 나서 마음먹었습니다. ‘희망을 놓지 말아야겠다. 죽은 동료를 위해서라도 다시 도전하자!’ 셰르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산으로 향했죠. 위기의 순간도 많았습니다. 천길 낭떠러지에 매달린 상태로 비바크(Biwak·산에서 텐트를 사용하지 않는 야영)를 하기도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유언을 해 놓았을 정도로 절박했어요. 하지만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정신을 다잡았죠. 그 덕분에 마침내 정상까지도 오를 수 있었답니다.



그 이후로도 살면서 힘든 순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오면 그 때를 떠올립니다. 사실 높은 산을 오르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대자연의 기상 변화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제 마음 속의 수많은 갈등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꿈을 이루지도, 살아 돌아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저는 멀리 등정을 떠날 때면 책을 꼭 챙겨 갑니다. 평소 바빠서 못 읽었던 책을 가져가는 겁니다. 험한 산속에 있을 때야 책을 읽기가 힘들지만, 베이스캠프에서는 책도 읽고 음악도 들으며 마음의 위안으로 삼는답니다.



제게 ‘16좌 완등’에 이어 ‘16개 학교 짓기’라는 꿈을 심어준 또 하나의 책이 있습니다. 바로 『세 잔의 차』(그레그 모텐슨)라는 책이죠. 길 잃은 산악인이 우연히 한 마을에 머물며 그들과 우정을 나누게 된 후 80여 개의 학교를 지어주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온갖 어려움을 딛고 약속을 지켜내는 과정이 감동적이죠.



저는 2008년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했고, 올 5월 첫 번째로 지은 학교가 개교했습니다. 학교가 세워진 네팔의 4060m 고지대 팡보체 마을은 제가 에베레스트 등반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잃게 된 동료의 고향입니다. 저는 그동안 16좌 완등에 성공하면 그 친구의 유가족과 고향 마을을 위해 반드시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앞으로 교육환경이 열악한 나라에 학교를 더 짓고 싶답니다.



엄홍길 대장의 손때가 묻은 책들. 『살아있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와 『세 잔의 차』
요즘도 저는 가끔 『살아있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를 다시 꺼내봅니다. 여러분들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을 놓지 않았던 남극 탐험 대원들을 떠올리면 힘이 날 겁니다. 공부하기가 아무리 힘들다 해도 목숨을 내놓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여러분, 앞으로 꿈을 이뤄나가는 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신념과 용기를 잃지 마세요. 목표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항상 가져야 합니다. 살다 보면 후회가 밀려오는 때가 있을 수도 있고 심지어 죽고 싶은 때가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내가 지금 견디지 못하면 내 인생에서 어떤 일도 해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겨내세요. 사실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저 지나가는 한 순간에 불과한 경우가 많거든요. 정상까지 오르는 일은 나 스스로 할 수밖에 없는 일이랍니다. 가족이라도 대신 해줄 수 없어요. 내가 걸어가야 합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이겨내면 반드시 기쁨으로 가슴 벅찬 날이 올 거란 걸 잊지 마세요.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