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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황장엽이 남긴 숙제

중앙일보 2010.10.12 20:40 종합 38면 지면보기
황장엽은 미스터리다. 그는 올해 6월 『논리학』이란 책을 펴냈다. 논리학은 철학의 한 분과다. 북한의 가족·친지를 모두 희생할 각오를 하고 남한으로 망명한 그다. 마지막 저서가 논리학이라는 사실이 새삼 그를 다시 보게 한다.



1997년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온 이래 그는 20여 종의 책을 펴냈다. 1년에 1∼2권 낸 셈이다. 예상보다 많은 양이다. 그중 상당수가 철학책이다. 『맑스주의와 인간중심철학』(전3권, 인생관·사회역사관·세계관), 『인간중심철학의 몇 가지 문제』, 『인생관』, 『민주주의 정치철학』, 『변증법적 전략전술론』, 『청년들을 위한 철학이야기』등이다. 회고록과 북한 관련 책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



그의 책은 대부분 ‘시대정신’에서 출판됐다. ‘시대정신’은 우파 보수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싱크탱크다. 1980년대 대학 운동권의 중심 역할을 하다가 전향한 이들이 주축을 이룬다.



11일 오후 11시 무렵,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아산병원 영안실. ‘시대정신’의 김영환·홍진표 이사를 비롯해 북한 민주화운동을 펼치는 이들과 탈북자 대표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지키고 있었다. 말년에 가까이 한 이들이다. 빈소 안팎을 가득 장식한 화환은 대부분 여권의 정치인이 보내 왔다. 그의 영정 앞에 놓인 ‘황장엽 선생 신위’란 문구가 낯설었다. 황장엽은 과연 누구인가. 정치인인가, 철학자인가. 고인에게 국화꽃 한 송이를 올리고 향을 피우면서 ‘분단의 희생양’이란 말로만 그를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에선 주체사상의 창시자였고, 남한에 와서도 다수의 철학서를 펴낸 고인과 한국의 지식사회는 한 번도 공식 대화를 갖지 못했다. 학술대회 한 번 열리지 않았다. 유일하게 사적으로 대화를 나눈 이는 동국대 철학과 홍윤기 교수다. 2002년 무렵 김대중 정부 말기에서 2003년 노무현 정부 초기에 이르는 1년간 매달 한 번 ‘철학 토론’을 했다. 홍 교수는 그의 ‘철학 하는 자세’가 돋보였다고 한다. ‘마르크스 철학→주체사상→인간중심철학’으로 그의 철학 여정은 이어진다. 자신의 철학을 위해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과정이 철학자인 홍 교수 눈에 부각돼 보인 듯하다. 고인이 본래 구상한 철학에는 지금 북한을 지배하는 ‘수령 중심주의’가 없었다고 한다. 수령 중심주의는 김정일 정권에 의한 왜곡이며, 권력에 의해 왜곡된 철학에 의해 북한 주민이 고통 받는 현실을 고인은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남한에 와서 주체사상이란 말을 폐기하고 인간중심주의 철학이란 말로 대체한 이유다.



이제라도 우리 지식사회가 ‘철학자 황장엽’에 대한 궁금증을 차근차근 풀어 주었으면 한다. 본래의 주체사상과 인간중심주의 철학은 수령론이 빠진 것 외에 얼마나 달라졌는가, 인간중심주의 철학이 하나의 유파로 성립 가능한가, 20세기 한국 철학자로 손꼽히는 유영모·박종홍·함석헌 등과 황장엽의 철학을 나란히 비교할 수 있는가 등등. 갑작스러운 타계에 이어 그의 정치적 측면만 부각되는 것 같아 아쉽다.



배영대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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