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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손학규표 진보’를 분명히 보여줘야

중앙일보 2010.10.06 00:19 종합 37면 지면보기
정치학을 공부한다는 나도 솔직히 그날 프로야구 롯데와 두산의 준플레이오프 경기를 보았다. 그 시간 인천 문학경기장에서는 민주당의 새 지도부를 선출하는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제1 야당의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는 중요한 정치 행사였지만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그동안 민주당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중도실용을 들고 나오면서 이념적 중간지대를 파고들었고, 최근에는 친서민과 공정한 사회를 말하면서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주장해 오던 의제마저 차지해 버렸다. 이에 대한 야당의 정치적 공세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의 노선 전환은 정치적으로 ‘약발이 먹혀들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이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50% 전후에 달하고 있다. 주요 의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반대자’로서의 주도권 역시 민주당은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 많은 국민이 보기에 제1 야당의 지도자는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이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여한 당원과 대의원들에겐 이런 열악한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을 테고 이러한 마음이 결국 리더십의 교체로 이어졌다. 손학규 대표는 당대표 경선 기간 동안 변화를 외쳤고 ‘잃어버린 600만 표’를 찾아와 재집권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부에선 손 대표의 당선은 그가 비호남 출신이어서 호남에 고립된 민주당의 지역 기반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는 당원·대의원들의 전략적 고려 때문이었다고 평가한다. 적어도 손 대표의 출신 기반인 수도권에선 지지세를 넓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나오고 있다.



야당이 다음 선거에서 집권을 꿈꾸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이를 위해선 근본적인 변화와 자기반성을 통해 정치적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지금 민주당에 필요한 것은 지역 연합과 같은 정치공학적 전략이 아니라 대안 세력으로서의 뚜렷한 비전과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말이다. 맹목적으로 표를 향해 쫓아간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 국민들이 민주당의 진정한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그때는 600만 혹은 그 이상의 표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될 것이다.



전당대회 이후 민주당에선 선명 야당에 대한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야당의 선명성 역시 이제는 투쟁력보다는 집권당과 뚜렷이 구분되는 대안 세력으로서의 비전과 가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에 야당의 선명성을 정권타도와 같은 강경 투쟁의 모습에서만 찾으려고 하기 쉽지만, 야당의 선명성은 결국 독재 시대에 야당이 내세웠던 민주화라는 비전과 가치로 인해 빛이 났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민주당이 시급하게 풀어야 할 과제는 ‘길 잃은 진보’의 새로운 좌표를 찾는 일이다. 진보와 변화를 말하고 있지만 경선 기간 중 행한 연설과 토론에서 ‘손학규표 진보‘가 과연 무엇인지 아직 그 실체가 그리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손 대표가 생활진보·실천진보를 말하고 있지만 이미 친서민을 외치면서 이념적 중간지대를 차지해 버린 이명박 정부와 뚜렷한 차별성이나 대척점을 만들어 내기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 사실 남북문제나 지역 기반을 제외하면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차이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힘없는 야당 신세는 생활진보의 내용을 갖추고 있더라도 그것을 ‘실천’하기 어려운 입장이기도 하다.



손 대표는 경선 기간 중 대선 후보‘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이 당대표가 돼야 민주당에 집권 기회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대선까지 불과 2년 정도 남은 만큼 손 대표로선 당권을 차지한 기회를 활용해 차기 대선 후보로서 당내 입지를 구축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손 대표든 누구든 차기 대선에서도 승리를 얻을 수 없다. 단순히 당을 대표하는 얼굴의 교체가 아니라 당의 근본적인 변화를 유권자들이 실감할 수 있도록 하는 차별화된 가치·비전을 만들어 내는 것이 민주당의 새로운 리더가 된 손 대표가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다.



제1 야당인 민주당이 정치적으로 활력을 되찾는 것은 우리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모름지기 야당이 건강해야 권력도 건강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지난 2년간 춘천에 칩거하며 가다듬었을 손 대표가 꿈꾼 새로운 민주당과 진보의 방향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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