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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85) 고아들을 품에 안다

중앙일보 2010.10.05 01:49 종합 10면 지면보기
1952년 백선엽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광주 송정리에 있는 ‘백선 육아원’을 찾아 원생들과 함께하고 있는 모습. 백선 육아원은 지리산 토벌을 마무리 지은 뒤 부모를 잃은 빨치산 고아 300여 명을 돌보기 위해 세워졌다. 기구한 운명에 처한 고아들과 백 장군의 인연과 재회는 한국 현대사의 지난 60년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백선엽 장군 제공]
나는 요즘도 눈을 감으면 60년 전의 전쟁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장면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중에서도 나의 뇌리에 가장 깊숙이 파고들었던 모습이 있다. 바로 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의 가련한 얼굴들이다.


죗값은 빨치산 자신이 치르면 됐다
광주에 건물 얻고 미국 후원 받아
고아 300여 명을 먹이고 가르쳤다
그렇게 57년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내가 전쟁 고아들을 한꺼번에 많이 볼 수 있었던 곳은 ‘백 야전전투사령부(이하 백야사)’ 출범과 함께 남원과 광주에 만든 포로수용소였다. 나는 그곳에 자주 들른 편이었다. 새로 들어오는 빨치산 포로와 그 가족들을 엄격하게 잘 관리하는 것이 백야사의 주요 임무였다.



내가 수용소를 방문하는 일이 잦을수록 그곳의 관리도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최고사령관이 관심을 기울이는 쪽에 부하들의 관심도 쏠리게 마련이다. 죄를 지은 빨치산들은 죗값을 치러야 했지만, 그렇지 않은 단순 가담자와 가족들은 최대한 구조해야 했다. 나는 그렇게 포로수용소를 자주 방문하면서 고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헐벗고 굶주린 점이야 뭐라 더 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들은 한반도를 휩쓴 이데올로기의 대립에서 가장 처절하게 내몰린 존재였다. 나는 내 눈에 들어왔던 빨치산 고아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이데올로기가 죄라면 죄다. 무고한 생명, 특히 이 세상에 태어나 까닭을 알 수 없는 전화(戰禍)에 휘말려 부모와 형제를 잃고 홀로 남은 고아들은 그때 한국이란 땅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였다.



로버트 피어스(1914~78)
나는 그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돌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지리산과 그 주변에서 활동하다 총구 앞에서 스러져간 빨치산이 남긴 고아들을 돌보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전쟁과 살육은 한반도 사람들에게는 느닷없이 다가왔다. 일제의 통치를 벗어난 직후의 해방 정국과 여기에서 이어진 분단 구도 아래서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이데올로기의 참담한 전화에 휩싸였다. 그 와중에 벌어진 수많은 살생(殺生)은 끊임없이 ‘보복의 악순환’이라는 고리를 형성했다.



한쪽이라도 어서 그 감정적이면서 원초적인 보복과 살육의 고리를 끊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자녀에게 눈을 돌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 고아들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어야 계속 이어질 수도 있는 감정의 악순환을 조금이라도 끊고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백야사 참모장 김점곤 대령을 사무실로 불러 “이제 사령부 차원에서 빨치산 고아들을 돌봐야겠다. 먼저, 마땅한 장소를 물색해 보라”고 지시했다. 김점곤 대령은 광주 출신으로 부친과 형이 빨치산에게 살해당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김 대령은 즉시 내 지시를 행동에 옮겼다.



나는 그에게 “전주에 가 보고 마땅한 곳이 없으면 광주에도 다녀와 보라”고 했다. 김 대령은 나름대로 고아들을 수용할 시설 후보지를 열심히 물색했다. 그러나 잘 찾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먼저 전주에 다녀온 뒤 내게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 가옥에 수용시설을 만들어야 하는데 전주에서는 그럴 만한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이을식(1897~2007) ※호적상 1900년생
김 대령은 이어 이을식 당시 전남도지사에게도 협조를 구했던 모양이었다. 고아들을 수용할 시설이 필요하니 행정적인 협조를 부탁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이 지사는 “광주 송정리에 적산 가옥이 하나 있다”는 말을 해 줬다. 김 대령은 그런 과정을 거쳐 결국 광주 송정리역 근처에 있던 적산 가옥을 찾아냈다.



우선 이곳에라도 고아들을 수용하고 돌볼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당시 빨치산이 남긴 고아들은 다양했다. 연령층은 대개 젖먹이부터 중학생 정도까지였다. 이들을 포로수용소에 오래 둘 수 없었다. 그들 나이에 맞는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이었다.



고아 가운데 일부는 주변 친척들이 수용소에 찾아와 데려가기도 했고, 지방 경찰들이 입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수용소에 기거하면서 포로로 잡힌 빨치산과 그 주변 가족들 틈에 섞여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 ‘백선(白善) 육아원’이었다. 내 성(姓)과 이름의 앞글자를 붙여 명칭을 만드는 것이 다소 쑥스럽기는 했지만 어쨌든 당시로서는 그런 명칭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본인들이 남긴 건물이기는 했지만 당장 오갈 데 없이 고생만 하는 고아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고아는 300명 정도였다. 이들을 먹여 살리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았다. 미 고문관들과 광주 교육 총본부가 구호금품을 보내줬다. 이을식 전남도지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처음에 육아원에서는 빨치산 고아들만 보살피는 게 원칙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더 많은 고아를 남겼다. 광주와 전남 일대의 다른 고아들도 보육원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육아원 설립 때에 비해 더 많은 경비가 필요한 상황이 됐다.



이들이 먹을 채소를 자체적으로 마련하기 위해 나는 사비(私費)를 들여 제법 넓은 육아원 주변의 땅을 사들인 뒤 밭으로 가꾸기도 했다. 그렇지만 장기적인 재원 마련이 중요했다. 당시 종군기자로 한국에 와 있던 로버트 피어스가 적극적인 도움의 손길을 폈다. 세계 선명회 총재로 활동했던 그는 미국에서 후원회를 조직했다. 열성적으로 뛰어다닌 그의 활동 덕분에 육아원 아이들에게는 1인당 10~15달러가 지급되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 그런 원조는 약 20년 동안 이어졌다.



아이들은 자라서 육아원을 떠났고, 그곳은 한 10년 동안 문을 닫기도 했다. 1988년 나는 김점곤 당시 참모장 등 이사진과 협의해 건물과 채소밭을 합쳐 수십억원 규모로 불어난 이 육아원의 전 재산을 천주교 대구 교구 수녀원에 기증했다. 수녀원은 그곳에 정신지체 아동들을 돌보는 시설을 만들었는데 굳이 그 이름을 ‘백선 바오로의 집’으로 지었다.



세월은 참 빨리도 흐른다. 남원과 광주의 수용소에서 오갈 데 없는 천애의 고아였던 그들은 이제 벌써 늙은이가 다 됐다. 그들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2009년 5월이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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