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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볼 수는 없지만 보여 줄 수 있는 세상은 아주아주 많습니다

중앙일보 2010.10.05 01:28 종합 21면 지면보기
“제 손 잡으세요. 불안해할 것 없어요, 안전하니까.”


사고로 시각·안면장애인 된 강시연씨 ‘어둠 속의 대화’로 희망 찾다

지난 3일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의 한 빌딩 9층에 있는 ‘어둠 속의 대화’ 전시장. 빛이 차단된 암실 같은 전시장에서 젊은 여성이 관람객들을 이끌고 있었다. 관람객들은 이 여성을 따라 90분간 어둠 속을 손으로 더듬으며 시장과 공원·도로 등을 둘러봤다. 시각장애인의 도시 생활을 체험하는 것이다. ‘어둠 속의 대화’ 전문 가이드 강시연(25)씨. 관람객들은 강씨가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고 깜짝 놀라곤 한다.



‘어둠 속의 대화’ 가이드는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는 관람객을 도와준다. 강시연씨의 손(왼쪽)이 관람객의 손(오른쪽)을 잡아 이끌고 있다. [오종택 기자]


가이드 일을 시작하기 전엔 그 역시 암흑 속에 갇혀 있었다. 그에게 불행이 엄습한 것은 2002년 7월이었다. 강씨는 친구의 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친구의 운전 미숙으로 자동차는 인근 주유소를 향해 돌진했다. 주유기를 들이받은 차는 뒤집힌 채 50여m를 미끄러졌고, 운전자 뒷좌석 천장이 심하게 찌그러졌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강씨는 눈썹 아래 얼굴 뼈 전체가 훼손되는 중상을 입었다. 18시간의 대수술이 이어졌다. 갈비뼈와 엉덩이뼈를 가져와 얼굴 형태를 만들었다. 코가 있던 자리에는 인공뼈가 들어갔다. 엉덩이 등에서 피부를 떼 이식했다.



“엄마, 불 좀 켜줘.” 두 달 만에 의식이 돌아온 강씨의 첫마디에 엄마는 소리 죽여 울었다. 강씨가 누워 있던 중환자실은 환했던 것이다. “안구가 복구할 수 없을 만큼 손상됐습니다. 빛조차 가늠할 수 없는 전맹(全盲) 상태입니다.” 강씨는 시각장애인 선고를 받았다.



수술로 강씨는 목숨을 건졌지만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계란 같다’는 말을 듣던 얼굴은 넓적하게 커졌다. 오른쪽과 왼쪽의 대칭조차 맞지 않았다. 코는 낮고 뭉툭해졌다. 눈동자 색깔도 흙빛으로 변했다. TV에서 유명 연예인의 어린 시절을 재연하는 아역 배우로 활동하며 배우의 꿈을 키우던 강씨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틈만 나면 보이지도 않는 얼굴을 손으로 더듬으며 울었다.



몇 달이 흘렀다. 누군가 다급하게 의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맞은편 침대에서 전기충격기 소리가 ‘팡팡’ 하고 터졌다. 그리고 잠시 후, 여러 명의 사람이 병실로 들어와 낮게 흐느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강씨는 맞은편 환자가 숨을 거둔 사실을 알았다. 강씨는 처음으로 ‘살아서 이곳을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후회만 했어요. 그날 왜 그 차에 타고 있었을까 하고. 그런데 죽음을 접하고 나니 하고 싶은 일들이 생겼어요.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고 친구도 만나고 싶고. 살고 싶었어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얼굴을 보여주는 건 여전히 두려운 일이었다. 텔레마케터 일을 하려고 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매일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며 낯선 사람을 만날 필요도, 동료에게 얼굴을 내보일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세상으로 다시 불러낸 건 ‘어둠 속의 대화’였다. “전시장에 들어갔다 나온 다음 관람객 앞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어둠 속이라면, 진짜 나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2007년 그는 가이드 채용에 도전했고 합격했다.



전시장에 온 관람객들이 관람에 앞서 전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어둠 속의 대화 제공]
그는 전시 마지막에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란 걸 공개한다. 관람객들은 “전시 내내 길을 안내해준 사람이 시각장애인이었느냐”며 놀란다.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안아주던 엄마 같은 관람객도 있었다. “지금의 내 모습으로는 누군가를 만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둠 속에서 나눈 관객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았어요. 그게 제가 만든 한계였다는 걸.”



강씨는 지난해 전시장 안에서 한 관람객이 해준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선생님, 너무 예쁘세요. 지금 볼 수는 없지만 알 수 있어요.”



글=정선언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어둠 속의 대화=1998년 독일에서 처음 시작된 체험형 전시. 관람객들은 전문 가이드의 안내로 90여 분간 도로·시장·공원 등의 체험 코스에서 어둠 속의 일상을 경험한다. 미국·프랑스·덴마크 등 전 세계 25개국 150개 도시에서 전시 중이다. 2007년 국내에 처음 소개됐으며 올해 서울에 상설 전시장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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