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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방정식은 없다’ 금기 비틀고 한 방 먹이다

중앙일보 2010.10.05 00:26 종합 27면 지면보기
최제훈씨의 첫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은 형식실험이 돋보인다. 최씨는 “흔히 독자와의 소통을 얘기할 때 너무 균일한 하나의 독서 집단을 상정하는 것 같다”며 “문학에 대한 정의에 짓눌리기보다 다양한 소통 방법을 찾고자 실험적인 작품을 쓰게 됐다”고 했다. [김도훈 인턴 기자]
버릴 게 별로 없어 보인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소설이 쓰고 싶어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또 다녔고, 2007년 문예지 ‘문학과사회’ 신인상으로 등단한 늦깎이 소설가 최제훈(37)씨. 그의 첫 소설집인 『퀴르발 남작의 성』(문학과지성사) 이야기다.


첫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
늦깎이 작가 최제훈씨

책에 실린 8편의 단편이 한결 같이 개성적이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랄까. 최씨는 셜록 홈즈·프랑켄슈타인 등 더 우려낼 건더기가 없어 보이는 ‘고전급’ 소설들을 교묘하게 비튼다. 신문 기사나 잡지 인터뷰는 물론 객담이 절반인 대학 강의실의 수업 등 우리 주변에 유통되고 있는 이야기도 거침 없이 가져다 쓴다. 이런 형식 일면 흡입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런데 결과는 다르다. ‘지금 이야기를 읽는 중’이라는 사실을 수시로 일깨운다. 흥분하지 마, 이건 이야기일 뿐이라고, 라며 슬쩍 옆구리 찌른다고 달까. 그러면서도 말이 능청스러워 술술 읽힌다.



형식 면에서 가장 이색적인 작품은 표제작이자 등단작인 ‘퀴르발 남작의 성’이다. 오해 마시라. 여기서 성은 성(性)이 아니다. 남작의 성(城)을 뜻한다. 17세기 프랑스의 크뢸리 지방에 살았던 남작이 영원한 젊음을 얻기 위해 성 주변 아이들을 잡아다 요리해 먹었다는 소문이 모든 사태의 출발점이다. 소설은 소문이 샤를 페로식 잔혹 동화, 소설, 영화, 리메이크 영화 등을 거치며 조금씩 변주되는 과정은 물론 대학 강의실, 인터넷 공간 등에서 유통되는 양상까지 주어 섬긴다.



최씨는 이런 내용을 시간적으로는 수 백 년, 공간적으로는 동서양에 걸친 모두 12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전달한다. 물론 에피소드의 배열은 시간 순이 아니다.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는 화제가 부족한 어정쩡한 관계의 대학 선후배 남녀가 가상의 여성 마리아 얘기를 꾸며대며 데이트 순간의 곤란함을 모면하는 얘기다. 여성 이름 마리아는 물론 ‘말이야’의 우리말 발음에서 따온 것이다. ‘그림자 박제’는 심심풀이로 다중인격 놀이를 시작한 기러기 남편이 증상이 악화돼 살인까지 하게 되는 이야기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번역투 문장을 흉내 낸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에서는 홈즈가 추리작가 코난 도일의 자살 사건을 맡아 파헤친다.



마지막 작품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에서는 앞서 7개 단편의 등장인물이 모두 나와 야단법석 파티를 벌인다. 소년이 잠든 시간 깨어나는 장난감들처럼.



혹시 작가는 ‘낯섦’을 무기로 통해 관심을 끌려는 걸까. 최씨는 “뒤늦게 소설을 쓰다 보니 쓰고 싶은 대로 써보자는 생각이 강했다”고 말했다. “반대로 진작 소설에 뜻을 둔 나이 어린 동료 소설가들이 너무 소설이라는 개념에 짓눌리는 같더라”는 것이다. 소설은 이래야 된다는 금기가 없다 보니 가벼울 수 있었던 게다.



다음 작품은? 장편에서도 이런 형식실험이 가능한 걸까? 최씨는 “다음 번엔 차분한 서사가 두드러진 작품을 써보고 싶다”며 슬쩍 빠져 나갔다. 조금 충격적인 사실 하나. 인터뷰 중 최씨는 ‘퀴르발 남작…’에 등장하는 동화·소설·영화 등이 모두 허구라고 밝혔다. 한 방 먹었다. 최씨의 형식 실험은 만만치 않았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김도훈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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