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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유물로 본 내고장역사 ⑥ 아산·성환이 겪은 청일전쟁

중앙일보 2010.10.01 00:06 6면 지면보기
일본군이 청군을 물리친 기념으로 세웠다고 전해지는 아산 영인면 강청리의 ‘진청암(鎭淸岩)’. [조한필 기자]
“아산이 깨지나, 평택이 무너지나.” 이 말은 1894년 한반도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때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산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와 이를 공략하러 평택으로 내려온 일본군을 빗댄 말이다. 결론은 아산이 깨진 꼴이 됐다. 청군(淸軍)은 아산 주둔지에서 약 15km 떨어진 성환으로 나와 일본군을 맞아 싸웠으나 패배했다. 청나라 패잔군은 뿔뿔히 흩어져 공주로 도망쳤다.


“청군이 깨지나, 일본군이 무너지나” … 동아시아 판도 뒤바꾼 국제전

일본군은 아산의 청군 주둔지까지 밀고 내려가 그곳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해 승리를 자축했다. 성환전투가 벌어진 날은 7월 29일(양력)이었다. 나흘 전인 7월 25일 아산만 앞 풍도(현재 안산시 지역)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청나라를 상대로 승리한 이후 일본 육군이 거둔 첫 승리였다.



천안시 성환읍은 성환목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일본인이 세운 곳으로 소·말의 우량종을 번식시키던 종축장이 있었다. 향토사학자 황서규(73·천안 성환읍)씨는 “일본사람들이 성환을 중시해 이곳에 많은 사람이 들어와 살았다”며 “청일전쟁의 실질적인 첫 승리를 여기서 거둬 대륙 진출의 계기를 마련한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황씨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증기기관차 용수 급수를 천안역이 아니라 성환역에서 했을 정도란다.



천안박물관 소장의 청일전쟁 기록 판화첩에 수록된 일본군 개선 장면. 성환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된 개선문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중앙포토]
◆사라진 일본 승전비들=일본인들은 한일합방(1910년)을 전후해 성환에 잇따라 승전비를 세운다. 세 개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남아 있지 않다. 해방직후 주민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고 그 자리엔 건물들이 들어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먼저 일본군 전사자 충혼비가 1901년 세워졌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안성천 너머의 격전지 성환 안궁리였다. 1933년 발행된 『천안군세일반(天安郡勢一班)』에는 충혼비 사진과 함께 “일본군 33용사를 기리며 비를 세웠다”고 적혀있다.



두번째 비는 성환역 부근인 옛 성환읍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현재의 성신초교 자리다. 첫 장교 전사자인 마츠자끼(松崎)대위의 기념비다. 그는 안성천을 건너다 전사했다. 일본인들은 그곳에 비를 세우고 일대를 성환공원으로 조성해 성역화했다. 이곳은 청일전쟁때 청군 요새가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1911년 초대 조선총독이었던 테라우찌 마사다께(寺內正毅) 등이 돈을 내 이듬해 10월 준공시켰다. 9m가 넘는 거대한 비로 휘호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사령관인 오시마가 썼다. 공원 입구엔 또 마츠자끼 대위 옆에서 총에 맞고도 나팔을 놓지 않고 불었다는 한 병사 기념비도 있었다.



황씨는 “최근들어 주민들 사이 부끄러운 역사도 간직할 역사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청일전쟁 관련 비석들이 모두 사라진 걸 아쉬워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청군이 주둔했던 아산의 일본 승전비도 사라졌다. 김명섭(73·아산 영인면 백석포2리)씨는 “청군이 상륙한 백석포까지 일본군이 들어와 이 곳에 세운 승전비를 어렸을 적 봤다”며 “해방직후 포구 앞 논 가운데 있던 비를 주민들이 부숴 버렸다”고 기억했다.



당시 아산에선 일본 강요에 의해 개선문을 만들고 대대적인 일본군 환영식을 열어야만 했다. 일본인들은 영인면 아산리 영인산 기슭에 ‘일청전쟁승전기념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아산군지』1983년)



성환의 현 성신초교 자리에 있던 마츠자끼대위 기념비. 해방 직후 파괴됐다. [‘천안군세일반’(1933년) 수록]
◆청망이들=현지에서 불리는 지명에서 청일전쟁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청망이들은 성환 안궁리 일대 넓은 평야지대를 일컫는 말이다. 청망이들의 ‘청망(淸亡)’은 청나라 군대가 망한 곳이란 뜻이다. 안성천을 건너던 옛 다리(현 안성교)를 ‘망근다리’라고 부르는 데 일부에선‘망군(亡軍)다리’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여긴다. 여기서 망군은 물론 청군을 뜻한다.



성환 복모리에는 몰왜보(沒倭洑)로 불리는 둑이 있다. 왜군(일본군)이 이 둑에서 많이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안성천을 건너면서 마츠자끼 대위 등 전사자가 속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전투 초반엔 청군이 승리했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이와관련 당시 러시아외교관이었던 제노네 볼피첼리가 지은 『구한말 러시아 외교관의 눈으로 본 청일전쟁』(유영분 옮김, 2009년)의 “코키야마 중위는 선봉대를 지원하러 진격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20명의 병사와 함께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마침 그곳이 깊은 지점이어서 그만 익사하고 말았다”는 내용이 주목된다.



안궁리의 일본군 충혼비. 해방 직후 파괴됐다. [‘천안군세일반’(1933년) 수록]
◆아산·성환전투=실제적인 전투는 성환에서 치러졌다. 청 패잔병 일부는 최초 주둔지였던 아산 백석포로 도주해 일본군이 추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청군은 예치차오(葉志超)제독이 총지휘를 했으나 그는 병력 1000명을 데리고 공주로 이동해 있었다. 성환전투는 네스청(攝士成)이 약 3000명 청군을 지휘해 치렀다.



당시 청군 주력은 평양에 집결하고 있었다. 인천으로 상륙해 서울을 장악한 일본군을 위에서 내려와 물리칠 생각이었다. 일본군은 아산의 청병을 치고 빨리 돌아와 평양의 청군에 대비해야 했다.



성환전투는 어둠 속에 벌어졌다. 6월 초 아산 백석포에 상륙한 청군은 곧 남하할 일본군을 성환에서 대적하기로 했다. 아산에서 싸울 경우 퇴로가 바다로 차단되기 때문이다. 7월 26일 오전 성환으로 이동한 청군은 월봉산(해발 83m·한솔현대아파트 뒷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약 4km 전방의 안성천에 나가 일본군을 맞았다.



1929년 발행 일본어판 『아산군지』(2008년 번역 발행)에 따르면 전체 청병력은 4000여 명으로 그 중 1000명을 천안으로 이동시켰고(예치차오가 공주로 이동시킨 병력을 말함), 성환전투에 투입된 청병력은 총 3000명이었다. 주력은 성환에 배치하고, 병사 1000명과 포병은 우헐리(현재 성환면 우신리)에, 초병 80명을 직산에 두고 방어진지 공사를 하고 일본군의 남하를 기다렸다.



안성천 전투는 7월 29일 오전 3시20분 시작해 30분만에 청군의 패배로 끝났다. 이때 마츠자키 대위와 나팔수가 전사한다. 오전 6시 일본군이 월봉산 진지를 공격했다. 양쪽에서 포위된 청군은 오전 6시30분 요새를 버리고 도망했다. 오시마(大島)소장은 천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청군을 추격했고 다케다 중좌는 아산으로 진격했다. 당시 일본군의 총병력은 4000~5000명이었다.(일본측 자료는 병력 수를 줄여 3000명으로 기록했다) 패배한 청군은 공주로 집결해 청주·충주·춘천 등을 거쳐 평양까지 한달이상 걸려 이동했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당시 청군은 500명이 죽거나 부상당했고 일본군은 장교 6명과 병사 82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천안시지』(1997년)는 “성환에서 평택에 이르는 들판에는 몇년 전까지도 들일을 할 때 백골이 무수히 나왔다”고 적고 있다.



◆소사평(素沙坪)의 악연=소사장(素沙場)은 일본군이 청군과 안성천을 사이에 두고 주둔한 평택의 지역 이름이다. 현재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황씨는 “소사평은 성환·평택·안성에 걸친 넓은 평야지대를 총칭하는 말”이라고 했다. 청일전쟁터가 된 소사평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 9월 부산에서 올라오던 왜군들이 이곳에서 명나라 군대에게 참패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명군이 처음으로 소사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소사평은 400년 간격으로 중국과 일본이 승패를 주고 받은 곳이다. 정유재란 때는 왜군이 서울쪽이 아니라 천안쪽에서 올라 왔고, 청일전쟁 때는 중국이 성환쪽에 있었고 일본군은 위에서 내려왔다.



◆주민들 피해 막심=청일전쟁 당시 청나라·일본 모두 식량·인부·우마 등에 대한 준비없이 전쟁을 일으켜 군수물자 대부분을 현지에서 조달했다. 아산·천안 일대 강제적인 주민 동원 및 소·돼지 약탈이 자행됐다. 특히 아산에 40여 일 주둔하는 동안 주민들 피해는 막심했다. 일본군이 현재 옛 아산감영이 있던 영인면 아산리에 입성했을 때 주민들 모두 피난 가 민가가 텅빈 상태였다고 한다.



두 나라 군대는 조선을 위해 싸운다는 생각을 갖고 출병했다. 그래서 당연히 조선에서 보급품을 대 줘야 한다고 여겼다. 일본측은 조선을 청으로부터 독립시켜주기위해 대신 싸워준다는 의전론(義戰論)이 팽배해 있었고, 청측도 속국인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출병했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청나라의 경우 조선정부가 나서서 주민들로부터 징발해 도왔다. 둔포 포구의 배 20척을 징발하고, 각 집마다 인부로 1명씩 총 80명을 모집하고, 식량을 구하려 여각 , 부호들에게 돈을 차출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은 남의 나라들에 자신의 국토를 전쟁터로 내주고, 양민들이 약탈 당하는 걸 눈뜨고 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조한필 기자




청나라 - 일본 전쟁터가 된 조선



“동학군 막아 주겠다” 핑계로 서로 파병




청일전쟁은 1894년 7월 25일 풍도해전으로 시작해 이듬해인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맺은 강화조약으로 끝났다. 전쟁의 주역은 청나라 리훙장(李鴻章, 1823~1901·사진 왼쪽)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오른쪽)였다. 이홍장은 당시 청나라의 외교를 관장하던 실력자였고 이토 역시 일본 정국을 이끌던 정객으로 당시 총리였다. 청일전쟁엔 두 나라의 주요 인물들이 다수 관여됐다.



전쟁의 발단은 그해 4월 일어난 동학농민전쟁이었다. 진압에 힘이 부친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홍장이 선뜻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길 망설였다. 1갑신정변(1884년)이후 청·일간에 맺은 텐진조약 때문이었다. 조약에 따르면 어느 한 나라가 조선에 파병을 하면 상대편 나라에 통보를 하게끔 돼 있다. 청은 조선에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 1913년 중국 첫 총통)를 파견하고 있었는데, 그는 리훙장에게 “우리가 군대를 파견해도 일본은 군대를 파견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6월 9일 청군이 아산에 상륙하자마다 며칠후 일본군도 인천에 도착한다. 일본은 이미 조선에서 청나라와 일전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리훙장은 전쟁을 피하려 노력했다.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일본은 전시체제에 돌입,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한 상태였다.



천안 성환의 향토사학자 황서규씨가 성환쪽 안성천 둑에서 청일전쟁 당시 전투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일본군이 안성천을 건너 성환으로 진격하면서 마츠자끼 대위 등 다수가 전사했다. [조영회 기자]
7월 23일 그들은 인천에 있던 병력을 서울로 진입시켜 경복궁을 함락, 민비(후일 명성황후)를 배경으로 위세를 떨치던 민씨 척족세력을 밀어내고 김홍집 중심의 친일정권을 세운다. 경복궁 점령 이유는 현 정권이 국내 정치 개혁을 늦춰 동학농민군 진압이 힘들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틀후 전쟁은 개시됐다. 풍도 앞바다에서 청군 1200명을 태운 영국 상선 고승호를 침몰시킨다. 일본군함 함장은 후일 러일전쟁(1904년) 영웅이 되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1848~1934)였다. 그리고 나흘 후 성환전투. 정식 전쟁 선포는 8월 1일 있었다.



일본은 파죽지세로 승리했다. 7월 29일 성환전투, 9월 15일 평양전투, 9월 17일 황해해전, 10월 25일 압록강전투, 1895년 1월 랴오뚱반도(뤼순,다롄) 함락, 1895년 2월 산둥반도 웨이하이웨이(威海衛) 포위. 일본 군부 실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 총리·추밀원의장 역임)도 9월 중순 새 일본군 사령관으로 조선 땅을 밟는다.



웨이하이의 북양함대가 일본함대에 포위해 띵주창(丁汝昌,1836~1895))제독이 이토에게 항복을 수락하고 자결, 사실상 전투는 종결됐다. 2달후 이홍장이 일본으로가 항복문서에 조인한다. 현지에서 72세인 이홍장은 보수우익청년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가벼운 상처만 입는다. 이 저격사건이“청나라를 도왔다”는 얘기가 있다. 국제 여론이 청나라 쪽으로 기울었고 일본에서도 동정론이 대두됐다. 삼국간섭(러시아,프랑스,독일)의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빼앗기는 수모를 가까스로 면했다.







청일전쟁은 신흥 제국주의국가 일본과 쓸어져 가는 왕조국가 청나라가 조선 지배권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싸운 전쟁이다. 청나라는 이 전쟁의 패배로 10여년 후 종말을 맞고, 일본은 조선 병합의 제1보를 딛게 된 것이다.



이 같이 중요한 국제전의 서막이 아산만에서 열린 것이다. 풍도해전과 성환전투에서 일본은 기세를 잡아 전쟁의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사진=조영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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