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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첫얼음

중앙일보 2010.09.30 01:27 종합 39면 지면보기
반전운동을 하며 ‘미국의 양심’으로 불렸던 공상과학 소설가 커트 보니것의 소설 『고양이의 요람』엔 ‘얼음9’가 나온다. 얼음의 한 종류다. 이 얼음은 섭씨 46도에서 언다. 순식간에 지구 전체를 거대한 눈덩어리로 변모시킨다. 물론 소설 속 허구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얼음이 한 종류만 있는 건 아니다. 1900년 러시아 화학자 탐만은 물을 얼린 정상적인 ‘얼음1’에 3500기압을 가했을 때 새로운 상태의 얼음이 생기는 걸 발견했다. 밀도가 높아진 ‘얼음2’와 ‘얼음3’이다. ‘얼음1’은 분자들이 육각형으로 결합돼 있지만 ‘얼음3’은 사각형으로 구성돼 있는 식이다. 1946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하버드대 퍼시 브리지먼 교수도 구조가 다른 얼음들을 찾아냈다. ‘얼음6’의 경우 최소한 섭씨 80도가 될 때까지 고체로 머무르는 것으로 인식됐다. 이른바 ‘뜨거운 얼음’이라고 알려진 얼음이다. 실제로 ‘얼음9’도 있다. ‘얼음3’을 단숨에 냉각할 때 생성된다. 다행히 소설 속 ‘얼음9’와는 빙점(氷點)이나 성질이 다른 것이어서 지구를 얼려버리는 황당한 일이 생기진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얼음 종류를 따지며 살 일은 없다. 얼음은 그저 얼음일 뿐이다. 첫얼음(初氷)이나 살얼음(薄氷) 같은 구분 정도가 고작이다. 예부터 소설(小雪·11월 22일)이면 첫얼음이 찾아든다고 봤다. 첫얼음은 겨울의 징후다. 그래서 이때를 앞두고 월동 채비를 서둘렀다. 농가월령가의 한 대목이 바로 이 시기 풍경이다.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방고래 구들질과 바람벽 맥질하기/창호도 발라 놓고 쥐구멍도 막으리라’.



첫얼음은 시한(時限)이나 폐허의 의미를 담는 시어(詩語)이기도 하다. ‘얼어붙은 남한강 한가운데에/나룻배 한 척 떠 있습니다/첫얼음이 얼기 전에 어디론가/멀리 가고파서/제딴에는 먼 바다를 생각하다가/그만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습니다’(정호승 ‘남한강’). ‘첫얼음은 늘 내 심장을 붙잡고 밀치는 힘/어리석음과 욕망의 끝’(고형렬 ‘앗 첫얼음 얼다’).



어제 새벽 대관령과 설악산에 첫얼음이 얼었다는 소식이다. 지난해보다 12일, 11일씩 이른 것이라고 한다. 산간(山間)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여름옷 정리도 다 못하고 단풍 소식도 들리지 않은 터라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어쩌랴. 계절에 순응하는 게 사람의 일인 것을. 행여 첫얼음 소식에 움츠러들지 말고 늘 따뜻한 마음을 가질 일이다.



김남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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