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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30년 뒤 원화의 미래

중앙일보 2010.09.28 20:16 종합 34면 지면보기
1980년대 초 대만 관광객에게 최고 인기 상품은 가죽 점퍼였다. 어쩌다 내가 안내를 맡게 된 대만 대학생 A씨, 좋다는 곳 다 마다하고 남대문 시장부터 찾았다. 점퍼 하나를 고르더니 대뜸 5000원을 깎자고 했다(그는 “남대문에선 무조건 10% 넘게 깎되 주인이 붙잡으면 많이 깎고, 안 붙잡으면 덜 깎으라는 게 한국 관광의 지침”이라고 나중에 귀띔해줬다). 주인은 “노(NO)”. A는 ‘짜이젠(再見)’하며 나갔다. 다른 집에 가나 보다 했다. 웬걸 잠시 후 그 집을 다시 찾았다. 다시 흥정. 그렇게 7~8 번을 반복했다. 지친 표정의 주인은 결국 5000원을 깎아줬다. “내가 졌다”며.



A씨는 “10번이라도 다시 가려 했다. 생각보다 일찍, 싸게 사서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들려준 유머 한 토막. 죽고 못 살 미녀가 있다 치자. 그런데 딴 남자와 결혼했다. 남자의 선택은? 한국인, 술 먹고 결혼식장에 찾아가 ‘깽판’을 친다. 일본인, 눈물로 환송한다. 중국인이라면? 그녀가 딸을 낳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 딸이 또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다시 그녀가 딸을 낳을 때까지 기다린다.



참고 기다려 목표를 꼭 이룬다. 이게 중국인의 DNA란 얘긴데, 그 집요함에 질릴 정도다. 이처럼 인내·기다림이란 겉모습 뒤엔 목표에 대한 지독한 집착이란 중국인의 속내가 있다. 30년 전 덩샤오핑도 그랬다. 그는 ‘칼날을 감추고 숨어서 힘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24자(字) 지침의 마지막은 ‘할 일은 한다’는 유소작위(有所作爲)였다. 덩의 속내가 어느 쪽이었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30년이 흐른 지금 중국은 왼손에 도광양회, 오른손엔 유소작위를 쥐었다. 상대와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 번갈아 손을 내민다.



요즘 중국이 치르고 있는 두 개의 전쟁이 좋은 예다. 일본과의 영토전쟁, 미국과의 통화전쟁 얘기다. 센카쿠 열도 분쟁에서 중국은 오른손을 썼다. 일본을 쉴 새 없이 몰아붙여 항복을 받아냈다. 그래도 모자란다며 사과·배상을 요구 중이다. 벼랑 끝까지 몰고도 한 발 더 몰았다. 일본을 누르고 아시아의 맹주가 되겠다는 ‘목표’를 이룰 때가 됐다는 판단이 선 듯하다. 전형적인 유소작위다.



반면 위안화 절상을 요구하는 미국엔 왼손을 내밀었다. 23일 원자바오 총리는 “1인당 소득으로 따지면 중국은 아직 선진국의 10분의 1에 불과한 개발도상국”이라며 예봉을 비켜갔다. 물론 역공도 했다. 미국산 닭 제품에 고율의 반덤핑관세를 물리기로 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대응은 여전히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다. 도광양회식 더듬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왼손만 쓸 중국이 아니다. 길면 30년, 짧으면 10년 안에 통화전쟁을 끝낼 계획도 마련해 놓고 있다. 10년 안에 엔화·파운드화 같은 2급 국제화폐, 20년 안에 달러·유로와 견주는 세계 3대 화폐, 30년 안에 달러·위안화 기축통화 시대가 목표다(쑨자오둥 『위안화 파워』). 차곡차곡 수순도 밟고 있다. 이미 위안화 결제를 시작했고, 자본시장 개방도 착착 진행 중이다.



시작은 아시아 통화의 맹주 자리다. 그러려면 엔화를 물리쳐야 한다. 중국이 동남아 지원을 늘리고, 아시아를 단일 통화로 묶자고 주장하는 이유다. 물론 단일 통화의 중심은 위안화다. 그런데도 원화의 대응은 별 게 없다. 기껏 엔화의 몰락을 내심 고소해하며 지켜보는 정도다. 넋 놓고 있다가 중국이 30년 뒤 목표를 이루고 나면 어쩔 건가. 남대문 시장에 원화는 사라지고 위안화만 남을지 모른다.



<후기> A씨에게 5000원을 깎아줬던 남대문 상인의 뒷얘기. “중국애들, 무조건 10%는 깎자고 해. 붙잡으면 더 깎자고 들어. 그래서 안 붙잡아. 가격도 높이 부르지. 그 친구, 예상보다 2~3번 덜 왔어. 예상보다 5000원 덜 깎았고…. 나야 뭐, 덜 시달리고 더 번 셈이지.” 뛰는 중국인 위에 나는 한국인 있다더니. 간단한 중국말은 했던 30년 전 그 아저씨, 근황이 궁금하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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