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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이순신 장군은 ‘대양 해군’의 선구자였다

중앙일보 2010.09.28 20:10 종합 33면 지면보기
 
  이순신은 국가적 추모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의 무속신앙에서도 화를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영험 있는 신(神)으로 숭배되었다. 과거 충남 홍성군에서 무당들이 신으로 모셨던 이순신의 모습. ‘사해(四海)대왕’이자 ‘장군신’으로 묘사돼 있다(해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1592년 조선으로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통보받았을 때 명나라가 가장 먼저 취한 조처는 해방(海防) 강화였다. 톈진(天津)·산둥(山東)·뤼순(旅順) 등 베이징(北京)에 인접한 해역의 방어 태세를 점검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왜구(倭寇)의 침략에 시달렸던 명은 일본 수군이 이들 지역에 출몰하는 상황을 몹시 두려워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조선의 이순신 덕분이었다. 애초 일본군은 수륙병진(水陸竝進)을 기도했다. 부산에 상륙한 육군이 세 길로 북상하고 수군이 서해로 진입하면 몇 개월 안에 조선을 정복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실제 일본 수군이 한강을 통해 서울로, 대동강을 통해 평양으로, 압록강을 통해 의주로 진입하는 순간 ‘게임’은 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본 수군이 서해로 들어오면 산둥반도나 발해만을 통해 베이징과 톈진 등 명의 심장부를 공략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침략의 궁극적인 목표가 명 정복에 있었으니 명은 일본군의 서해 진입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 함대는 전라도 연안을 거점으로 일본 수군의 서진(西進)을 원천 봉쇄했다. 그것은 조선은 물론 명의 안보까지도 지켜낸 위업이었다. 명이 왜란 초반 조선에 육군을 파견하면서도 수군을 보내지 않은 것은 까닭이 있었다. 이순신의 맹활약이 거듭되면서 수군을 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1597년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에 참패했을 때 명은 화들짝 놀란다. 당장 일본 수군이 서해로 진입해 북상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대책회의를 열어 진린(陳璘)이 거느리는 함대를 조선에 파견한다. 백의종군 끝에 복귀한 이순신은 진린을 다독여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을 다시 장악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함대는 조선 방어에 그치지 않고 명의 안보까지도 지켜냈다. 이순신은 사실상 ‘동아시아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의 수군이 보여준 역량과 활약은 오늘날 우리가 염원하는 ‘대양해군’의 그것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섬의 영유권을 놓고 벌이는 중·일의 갈등이 점입가경이다. 그런데 한국 해군은 ‘대양해군’ 구호를 당분간 내세우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천안함 사태의 후유증 때문이란다. 하지만 오로지 북한을 막는 수준에만 눈높이를 맞추는 것은 미래의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다. 중·일 사이에 끼여 있는 데다 바닷길이 막히면 생존할 수 없는 나라에서 과연 옳은 자세일까? 문득 이순신 장군은 뭐라 하실지 궁금해진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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