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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81) 끝을 드러낸 토벌작전

중앙일보 2010.09.28 00:51 종합 10면 지면보기
겨우 17~18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 아이들이 일부는 바위 틈에 앉아 있었고, 일부는 총탄에 맞아 숨져 있었다. 그 모습들이 하도 이상해 자세히 살펴봤지만 분명 앳된 소녀들이었다. 전투 경험이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빨치산 전투부대원들이 이들을 총알받이로 내몬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소녀들까지 전장으로 내몰린 모습에서 부대원들은 심한 비애를 느꼈을 것이다.


밀고였다, 그들이 무너진 건 …
경남도당 간부 14명 무더기 사살 뒤엔
빨치산에 등 돌린 호위병이 있었다
토벌에 밀릴수록 적의 내분은 커갔다

산속에 오른 횃불이 상징하듯이 토벌대는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을 앞세워 1월 18일 날이 밝으면서 대대적인 공격을 펼쳤다. 아군 공군기도 수시로 작전지역 상공으로 날아와 빨치산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강렬하게 폭격을 퍼부었다. 이날 전투에서 토벌대는 300여 명을 사살하고 251명을 생포했다. 당시 대성골에 모여 있던 빨치산의 절반에 이르는 숫자였다.



경남 도당은 이로써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도당 위원장 남경우(당시 32세)를 비롯해 부위원장 2명, 조직부장과 선전부장 등 경남 도당의 간부 14명이 이 전투로 목숨을 잃었다. 아울러 57사단 정치위원 김의장, 9연대장 오재복, 전남 유격대의 지리산 파견대 오신태 대장, 구례 군당 위원장 조용길 등이 이 전투에서 사살된 것으로 군 기록에 나와 있다.



남경우 경남 도당 위원장은 모스크바 고급당학교를 나온 엘리트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남파 게릴라 양성소였던 ‘강동 정치학원’ 출신이다. 6·25전쟁이 발발한 뒤 북한군 위문공연단으로 남쪽에 내려왔다가 퇴로가 끊겨 지리산에 숨어든 문귀라는 여성이 그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 여성은 ‘지리산 미인’으로 불릴 만큼 대단한 미모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경남 도당과 57사단의 주요 간부 상당수가 전사할 정도로 수도사단의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수도사단의 압박이 제대로 먹혔을 뿐만 아니라 토벌대의 강력한 공세에 직면한 빨치산 내부의 분열도 한몫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작전이 펼쳐지면서 숨어 있던 곳을 나와 토벌대에 귀순해 온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많은 것을 알렸다. 경남 도당의 남경우 위원장을 비롯한 고급 간부들이 대거 사살된 것은 그들 옆을 지키던 호위병의 밀고에 따른 것이었다.



전투는 그렇게 벌어졌다. 적은 이탈자가 속속 생겨나고, 간부들이 그로 인해 대거 몰살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수도사단은 지리산의 대성골을 비롯해 세석과 거림골·뱀사골·범왕골 등에서 적을 대거 소탕했다. 이제 남은 곳은 백운산이었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우뚝 서 있는 백운산은 전남 도당의 빨치산이 나름대로 규모를 유지한 채 버티고 있던 마지막 토벌 대상 지역이었다.



그들은 토벌대를 잘 몰랐다. 접전을 해본 적이 없어 토벌대의 공격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강점이 있었다. 토벌의 예봉(銳鋒)을 피해 숨어 있던 부대여서 병력과 물자 등을 충실히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토벌대가 지리산과 주변 지역을 공격할 동안 ‘보급투쟁’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51년 전라남도 화순에 만들어진 산간마을 주민 수용소의 모습. 산간마을은 빈번하게 빨치산의 ‘보급 투쟁’ 대상이 됐기 때문에 주민들을 다른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작업이 필요했다. ‘백 야전전투사령부’도 이런 수용소를 많이 만들어 운영했다. 종군작가 고 이경모씨의 작품으로 『격동기의 현장』(눈빛)에 실려 있다.
당시 전남 도당 빨치산 부대는 특히 보급투쟁에 매우 능하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백운산 부대’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민가를 대상으로 행하던 보급투쟁 또한 악명이 높았던 모양이었다. 이들을 사칭해 민가로부터 금품을 뺏어 챙긴 ‘가짜 빨치산 사건’도 나왔기 때문이었다.



1950년 말에 광양에 살고 있던 이종만(당시 24세)이라는 청년이 총 한 자루를 구해 지니고 다니면서 야간에 광양과 봉강면 등 민가에 여섯 차례나 침입해 “나는 백운산에서 왔다”고 협박한 뒤 금품을 털었던 사건이다. 그는 결국 꼬리가 잡혀 경찰에 붙잡힌 뒤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 ‘백운산 부대’를 소탕하는 작업이 토벌 작전의 마지막 고비였다.



수도사단은 전남 도당이 이끄는 빨치산의 실력을 잘 몰랐고, 저들 빨치산 또한 지리산을 훑으면서 작전을 벌였던 수도사단의 전투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 숨어다니기에 급급했던 지리산과 주변 지역의 빨치산과는 다르게, 전남 도당의 ‘백운산 부대’는 선공(先攻)을 펼쳤다.



1월 25일 아침에 적은 기갑연대 3대대를 기습해 박명경 대대장에게 대퇴부 관통상을 입혔고, 중대장을 비롯해 대대본부에 남아 있던 12중대 장병을 쓰러뜨렸다. 결과적으로는 1명이 사망하고 10명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었다. 그리고 적은 12중대 주력이 잠시 놓아두었던 배낭과 담요, 내의와 반합 등을 빼앗아 달아났다.



그 뒤로도 ‘백운산 부대’는 토벌부대의 주의를 흐트러뜨린 다음에 후방에서 공격했다가 잽싸게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면서 토벌대를 괴롭혔다. 특이하면서도 대담한 작전 구사였다. 이에 따라 아군의 피해가 조금씩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해질녘에 잠시 머문 석양(夕陽)의 잔광(殘光)에 불과했다.



수도사단이 전열을 가다듬고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으로 소규모 적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뛰어나가는 돌출 공격을 삼가면서 신중한 작전을 펼치자 백운산 부대의 기습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1월 26일부터 대대적인 섬멸전에 불이 붙었다. 상대의 틈을 노려치고 빠지면서 교란을 일삼는 빨치산 잔당(殘黨)의 작전은 이제 전혀 소용이 없었다. 수도사단은 막바지 혼신의 힘을 다 해 적을 몰아갔다. 곳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적이 출몰해 교전이 벌어지는 곳에서는 아군의 공군기가 쉴 새 없이 날아와 불을 뿜었다. 거센 작전은 31일까지 이어졌다. 사살된 빨치산의 숫자를 알리는 무선 보고가 사령부의 내 집무실로 계속 날아들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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