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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큰 여전사’ 이불, 그의 상상력은 어떻게 현실이 됐나

중앙일보 2010.09.28 00:09 종합 26면 지면보기
한국 미술에서 천더기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 드로잉(drawing)이다. 작가가 본격 작품 제작을 위해 어림잡아 그려보는 최초의 밑그림이자 설계도이기에 번득이는 직관이 엿보이는 중요 자료지만 시장성이 없는 탓에 홀대 받는다. 작가 역량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기초 공사란 뜻에서 화골(畵骨)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형 메모’ 드로잉만 180여 점으로 작품전

설치미술가 이불씨의 작품 설계도라 할 드로잉 180여 점이 한자리에 모인 전시장 광경. ‘나의 거대한 서사’ 연작(왼쪽 설치물)을 위한 드로잉이 뒤쪽 벽에 선보이고 있다. [PKM 트리니티 갤러리 제공]
설치미술가 이불(46)씨가 180여 점 드로잉만 가지고 개인전을 연 건 이런 현실에서 보면 위험한 시도였다. 지난 15일 서울 청담동 PKM 트리니티 갤러리에서 시작한 ‘이불 작품전’은 강인하고 저돌적인 작가 캐릭터가 어디에서 비롯했는가를 드로잉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한 모험이라 할 수 있다. 단단한 뼈대에 나름의 미감을 뽐내는 자그마한 드로잉들이 군집을 이뤄 대형 공간을 휘젓고 있는 풍경은 이불 작품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어서 연구 대상이다.



이불씨는 드로잉을 “떠오른 아이디어나 환상을 나 자신이 기억하기 위해서 시시콜콜 메모 형식으로 적어가는 조형 메모”라 정의했다. 드로잉 여백에는 작품의 재료나 당시 기분, 더 전개해나가야 할 암호 같은 제시어가 적혀있다. 그는 지난 5년 여 “가족을 희생해가며” 무지막지 작업에만 매달렸는데도 이중 작품으로 완성된 건 채 10%가 안 된다고 털어놨다. 원대한 구상과 현실 사이의 틈은 그를 힘들게 하지만 “나 자신에게 도전하는 일에 흥미가 있다, 난 아직 게으르다”는 말은 ‘설치미술의 여전사’란 그의 별명을 떠오르게 한다.



드로잉은 그가 2005년부터 집중해 파들어간 ‘나의 거대한 서사’라는 큰 주제를 변주하고 있다. ‘거대한 서사’가 불가능해진 이 쪼그라든 시대에 다시금 거대한 서사를 말하는 그의 배짱은 어디서 오는 걸까. 공중에 떠 있는 수정도시, 거대한 풍선이 방을 꽉 채운 판타지, 우주에 흐르는 암석 덩어리를 감싸버린 조형물 등 그의 통 큰 상상력이 드로잉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 있다.



이씨는 내년 11월부터 지난 20여 년 작업을 망라하는 회고전을 연다.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출발해 캐나다 밴쿠버미술관, 미국 뉴욕 브루클린미술관 등을 거쳐 한국에서 마무리하는 3년 프로젝트다. 출품된 드로잉들은 그가 3년을 버틸 수 있는 양식인 셈이다. 전시는 10월 15일까지. 02-515-9496.



정재숙 선임기자



◆이불=1964년 강원도 영월 태생. 87년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내면의 분노와 에너지를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예술가로 출발한 뒤 토종 작가로 세계무대에 우뚝 섰다. 남근 중심의 시각문화를 비판하고 여성 신체의 본질과 그 억압구조를 드러내면서 인간 몸의 미래를 전망한 ‘몬스터’ ‘사이보그’ 연작,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설치미술가로서 현대사회의 묘한 경계선을 허문 ‘노래방’ 프로젝트 등으로 99년 제48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현대미술전 특별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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