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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LG는 기술 대신 아이디어 지상주의에 빠져라”

중앙선데이 2010.09.18 23:57 184호 22면 지면보기
벤저민 조프
“한국과 중국은 정보기술(IT) 세계에서 갈라파고스 군도다.”
‘비행기 타고 온 괴짜들(Geeks on a Plane)’의 창립 멤버인 벤저민 조프의 말이다. 한·중 IT 생태계가 독특하다는 얘기다.

‘비행기 타고 온 괴짜들’의 벤저민 조프


조프가 속한 ‘괴짜들(23면 기사 참조)’은 미 실리콘 밸리 에인절투자자 모임이다. 21세기형 소셜네트워크답게 그들은 직업, 인종, 국적을 떠나 자유롭게 만나고 헤어진다. 기존 창투사 사람들과는 다른 종(種)으로 분류되는 이유다. 그들은 서류 뭉치나 파워포인트로 만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싫어하다 못해 혐오한다. 교회 부흥회처럼 뜨겁고 활력이 넘치는 콘퍼런스에서 개발자들을 만나 소통하고 의기투합한다.

중앙SUNDAY는 괴짜들 가운데 한·중·일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조프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첫 접촉부터 범상치 않았다. 트위터에 전화번호를 남기며 인터뷰를 요청하자 30여 분 만에 전화가 왔다. 그는 “여기 상하이 공항이다”며 “20분 뒤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오르니 질문하려면 지금 해도 된다”고 말했다. 한 주쯤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너무나 빠른 회신이었다. 사전 준비가 안 됐다고 이실직고한 뒤 4~5일 뒤에 통화하자고 말했다. 그는 “그때에 내가 어디 있을지 불확실하니 당신이 나를 찾아야 한다”며 인터넷 전화인 스카이프(Skype)의 아이디를 알려줬다. 실제 그와 인터뷰를 할 때 그의 위치는 남미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였다. 첫 접촉 이후 나흘 사이에 그는 중국에서 미국을 거쳐 남미로 이동한 것이다.

-칠레에는 무슨 일 때문에 갔나.
“이곳 친구가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왔다. 직접 만나 그의 아이디어를 들어보려고 왔다.”

-그를 미국 실리콘 밸리로 부르면 되지 않는가.
“그가 나를 만나러 올 시간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게 좋다. 나는 실리콘 밸리에 붙어 있기를 싫어한다. 그가 나를 만나러 오는 사이 아이디어가 사라져버릴 수도 있지 않는가.(웃음)”

조프는 IT 세계의 유행어인 ‘기술-다위니즘(Techno-Darwinism)’이란 말을 처음 만들어냈다. 많은 사람이 ‘IT 세계의 적자생존’쯤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오해라는 지적이 많다. 정확한 의미가 궁금했다. 그는 ‘IT 갈라파고스 현상’이라고 말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1880년대 찰스 다윈이 갈라파고스 군도에 도착해 아주 독특한 동물들을 발견했다. 그 동식물들은 애초 대륙에서 건너왔지만 갈라파고스 환경에 맞게 진화했다. IT 산업도 마찬가지다. IT 종주국인 미국의 구글이나 야후가 한국과 중국에서 맥을 못춘 이유다.”

-미국에서 시작된 IT가 한국과 중국에서 독특하게 진화했다는 말인가.
“바로 그 말이다. 한국 네이버와 중국 바이두가 자국 내에서 글로벌 검색 엔진인 구글이나 야후를 제치고 1등 하고 있다. IT가 한국과 중국 환경에 맞게 진화한 바람에 구글이나 야후가 적응하지 못했다.”

-반대로 두 나라 IT 모델이 글로벌 무대에에서 통하지 못할 듯하다.
“중국이 거대한 시장이니 세계 IT 모델도 중국 스타일처럼 바뀌고 있다. 한·중 IT 비즈니스 모델이 글로벌 스탠더드가 될 가능성이 크다.”

-괴짜들이 한국과 중국을 자주 찾는 이유인가.
“실리콘 밸리는 더 이상 참신한 기술이나 아이디어의 산실이 아니다. 이미 포화상태에 도달했다. 혁신 본능을 잃어버린 듯하다. 우리가 한국과 중국을 주목하는 이유다.”

조프는 한국어·일본어·중국어를 할 줄 안다. 그래서 괴짜들이 서울·상하이·도쿄·싱가포르 등에서 투자 콘퍼런스를 열면 조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전화 인터뷰 동안 금액 같은 숫자를 우리 말로 알려줬다.

-어떻게 한·중·일 세 나라와 인연을 맺었나.
“나는 김치나 스시처럼 ‘이’ 발음으로 끝나는 음식을 아주 좋아한다.(웃음) 프랑스 대학에서 공학석사를 받고 90년대 후반 일본 도쿄에 왔다. 프랑스 텔레콤 동아시아 담당이었다.”

-한국은 어떻게 알게 됐는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한국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얼핏 보면 일본과 비슷했다. 하지만 훨씬 역동적이었다. 김치의 매운맛처럼 한국인들의 성격도 분명했다.”
조프는 IT 컨설팅회사인 ‘8+’의 설립자 겸 최고경영자(CEO)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노키아, 차이나 모바일 등 글로벌 IT 메이저 플레이어들을 고객으로 두고 있다.

‘IT 생태계’를 분석하는 일이 그의 일이다. 나라마다 IT 산업 구성이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하는 것이다.

-한·중·일을 여행하다 보면 차이점을 잘 알지 않는가.
“한국은 아주 역동적이다. 일본은 잘 짜인 격자 같다. 벗어나기 힘들다. 중국은 부산하고 소란스럽다. 나는 한국을 가장 편안하게 느낀다.”

-중국 IT 기업들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벤처 기업을 세워 성공을 꿈꾸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인구가 많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바이두 등 성공신화도 존재한다. 제2, 제3의 바이두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많다.”

-중국 IT 기업들이 해외로 많이 진출하고 있다.
“일본 시장을 겨냥하는 IT 기업들이 많다. 그들은 러시아 시장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어떻게 하면 이 아이디어를 일본과 러시아 시장에도 적용할까’를 동시에 고민한다.”

-한국과 중국의 IT 기술 격차는 얼마나 있는가.
“한국 IT 인프라는 세계 최고다.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뛰어난 IT 서비스에 익숙해 있다. 중국 IT 기업들이 도저히 만족시켜줄 수 없는 단계에 있다. 이는 그들이 한국시장을 쉽게 공략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조프 등 괴짜들은 올 5월 한국을 방문했다. 투자할 만한 새로운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발굴하기 위해서다. 운전자들이 스마트폰으로 교통정보를 실시간 공유하도록 하는 플랫폼에 조프 등은 매료됐다고 한다.

-한국 개발자들의 신기술 개발 능력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
“한국 IT 기업들은 세계적인 기술이나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했다. 사이버머니처럼 가상 제품이나 서비스를 실물처럼 여기고 거래하도록 하는 비즈니스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왜 한국에는 구글이나 애플 같은 기업이 없는가.
“나도 처음에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한참 한국 IT 산업을 관찰한 뒤에야 알았다. 한국 벤처기업인들은 국내 시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글로벌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한국 IT 기업들은 해외 진출을 하려 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네이버는 세계에서 가장 빨리 지식인 서비스를 개발해 내놓았다. 야후와 구글이 뒤따라 비슷한 서비스를 도입했다. 내가 네이버 CEO라면 개발 순간부터 세계 시장을 겨냥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네이버는 세계적인 IT 기업이 됐을 것이
다.”

-기술이 부족해서 그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 IT 기업의 기술과 아이디어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글로벌 마인드와 금융·경영 노하우가 부족한 듯하다.”

조프는 한국 IT업계에서 유행한 ‘아이폰 쇼크’라는 말을 알고 있었다. 이는 애플 아이폰 열풍으로 한국 IT 기업들이 받은 충격을 말한다. 그는 “아이폰 쇼크는 한국 IT 기업들에 아주 좋은 자극제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라며 말끝을 흐렸다.

-한국 사람들이 원인 분석을 잘못하고 있다는 것인가.
“많은 한국 전문가들은 애플 CEO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다 개발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다. 아이폰은 애플 생태계가 진화한 결과다.”

-조금 쉽게 설명해 줘야겠다.
“아이폰 전에 아이튠스와 아이팟 등이 출현했다. 제품과 서비스, 네트워크가 하나로 융합된 유기적인 시스템 덕분에 아이폰이 탄생할 수 있었다. 잡스 혼자 그런 일을 다하지 못한다.”

-삼성이나 LG가 아이폰을 개발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삼성이나 LG는 소니처럼 기술 지상주의에 빠진 듯하다. 기술만 있으면 다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아이폰은 기술 집약체가 아니다. 최고 기술을 집약한 물건이 아니다.”

-기술이 있어야 아이폰과 같은 물건을 만들지 않을까.
“아이폰은 아이디어 집약체다.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샅샅이 분석해 얻은 아이디어를 종합하니 그런 물건이 나왔다. 기술은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아이디어 지상주의에 빠져야 삼성·LG가 애플처럼 성공할 수 있다.”




WHO?
벤저민 조프는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엘리트 교육기관인 그랑제콜(리옹기술대학)을 졸업한 공학도다. 그는 프랑스 텔레콤에 입사해 한국·중국·일본을 담당했다. 그는 에인절투자자이면서 IT 컨설턴트다. 2003년 IT 컨설팅회사인 ‘8+’를 설립했다. 서울, 도쿄, 상하이, 파리에서 각종 IT 창업 콘퍼런스를 해마다 주최한다. 요즘 그는 3D 인터넷 게임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중국 네티즌 사이에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파라다이스 페인트볼’ 게임을 개발한 CMUNE의 핵심 주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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