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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밸리의 ‘통념의 어항’ 깨고 팔딱이는 아이디어 찾아 세계를 떠돈다

중앙선데이 2010.09.18 23:55 184호 22면 지면보기
‘비행기 타고 온 괴짜들(Geeks on a Plane)’은 미국 실리콘 밸리의 에인절 투자자들 네트워크다. ‘괴짜들’은 신기술이나 사업 아이디어를 보유한 사람에게 창업자금과 경영 노하우 등을 제공한다. 그들이 하는 일 자체는 창투사 사람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실리콘 밸리가 초기 활력과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사정과 맞물려 그들이 주목 받고 있다.

‘비행기 타고 온 괴짜들’의 정체는?

요즘 실리콘 밸리는 ‘통념의 어항에 갇힌 물고기’라는 평을 많이 듣는다. 신선한 아이디어 하나에 신명 났던 예전의 실리콘 밸리가 아니라는 얘기다. 책상머리에서 결재 서류에 도장이나 찍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관료화는 기존 통념에서 벗어난 아이디어를 질식시켜버리기 일쑤다.

실리콘 밸리가 왜 그 모양이 됐을까. 거대 IT기업 시스코 등이 벤처투자에 나서면서 관료화가 빠르게 진행됐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시스코 등은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등을 졸업한 MBA(경영학 석사)들을 뽑아 창투 업무를 맡겼다. 그들은 현란한 투자이론으로 파릇파릇한 아이디어를 재단했다. 정태적이고 꽉 짜인 투자모델의 잣대를 통과할 아이디어는 많지 않은 법이다.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싹도 피워 보지 못하고 문서 파쇄기를 통과해야 했다.

실리콘 밸리의 1세대 마케팅 전문가인 레지스 매키너는 “도전적인 젊은이들이 밤새워 고민하고 토론해 아이디어를 짜내는 곳이라는 이미지는 요즘 실리콘 밸리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최고급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럭셔리한 레스토랑에서 고가의 와인을 마시며 탁상공론하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꼬집었다.

숨막힐 듯한 투자모델에 반기를 든 게 바로 ‘실리콘 밸리의 괴짜들’이다. 화석처럼 굳은 실리콘 밸리의 틀을 깨야 한다며 2009년 의기투합했다. 벤저민 조프와 미국 창투사인 500스타트업스(Startups)의 최고경영자(CEO) 데이브 매클루어, 중국계 벤처투자 블로거인 크리스틴 루 등이 앞장섰다.

괴짜들은 2009년 6월 7일 처음 비행기를 타고 일본 도쿄에 착륙했다. 컬트 모임처럼 몰입과 떠들썩함이 뒤섞인 ‘괴짜들의 파티(투자 콘퍼런스)’를 열었다. 당시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벤처 히피족이 일본을 방문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괴짜들의 파티를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서도 열었다. 그해 겨울에는 유럽 투어에 나섰다. 영국 런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 체코 프라하에서도 파티를 열었다.

대변인 격인 데이브 매클루어는 트위터를 통해 “2009년 금융위기 때문에 기업가 정신과 창업 에너지가 약해지고 있었다”며 “경제 활력이 남아 있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에서 새로운 창업 아이디어를 발굴하려고 투어를 조직했다”고 밝혔다.

멤버들은 올 8월 말 현재 52명이다. 5000만 달러(600억원)짜리 벤처펀드를 운용하는 매니저에서 블로거까지 다양하다. 괴짜들이 지닌 실탄(투자자금) 규모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매클루어는 말했다. 공식적으로 통계를 내본 적이 없어서다. 하지만 CNN머니는 지난해 11월 “실리콘 밸리 괴짜들이 움직이는 자금이 1억5000만 달러(1800억원) 정도”라고 추정했다.

괴짜들 모임에는 미국인들만이 있는 게 아니다. 벤저민 조프가 프랑스 출신이고 크리스틴 루가 중국계이듯 국적과 인종 구성이 무지개 같다. 아직 “한국 출신 정식 멤버는 없다”고 조프는 말했다.

괴짜들은 폐쇄적인 네트워크가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낄 수 있는 주막집 술자리도 아니다. 그들의 홈페이지를 통해 투어 참여를 신청하고 심사를 거쳐야 한다. 매클루어는 “서로 다른 가치에 낯설어하지 않는 투자자, 블로거, IT 기업인들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괴짜들은 올 10월 18~20일 다시 모인다. 올 들어 세 번째 회동이다. 이번에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다. 국제영화제(HIFF)와 병행해 괴짜들의 파티를 열 예정이다. 주제는 ‘(다시) 생각한다: 하와이에서’다. 소셜미디어의 역할과 미래를 다시 고민해보자는 얘기다. 대만 출신 부호 제리 왕 등이 특별 손님으로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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