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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 끝난 들판에 새 꿈을 심자

중앙선데이 2010.09.18 23:33 184호 30면 지면보기
16년 전 일이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자주 가던 카센터가 있었다. 타고 다니던 승용차가 고장이 잦아 한 달에 최소 한 번은 찾다 보니 자연스레 단골이 됐다. 차를 손보러 갈 때마다 주인 사장과 수리공 아저씨들이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보다도 나이가 많아 보이던 최고참 수리공 아저씨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박경덕 칼럼

“나 이제 그만둬유. 그동안 고마웠시유.”
“아 그래요….”

얼떨결에 떠난다는 말을 듣고 마땅히 할 말이 없어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으니 그가 말을 이어갔다.
“노래나 할려구유…오래전부터 가수가 되고 싶었는데…진짜 마지막으로 한번 승부해 볼라구유.”

순간 ‘아이쿠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20대도 아니고, 내일 모레 50을 바라보는 아저씨가 늦바람이 불었나, 웬 가수….’

그래도 그동안 내 차를 정성스레 고쳐준 그의 고운 마음을 생각하면서 따뜻한 악수를 나누고 “잘 사시라”며 헤어졌다. 집으로 가는 내내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아저씨를 다시 만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그의 사진과 기사가 실리기 시작했다. 방송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카센터를 떠나 ‘우리 시대의 소리꾼’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가 바로 장사익(61)이다.

추석 호에 나갈 칼럼의 글감을 고르다 장사익을 떠올린 건 그의 ‘다모작 인생’이 벼를 추수하고 보리를 파종하던 2모작 시절의 추석과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추석은 벼 수확뿐 아니라 보리 파종까지 준비해야 하는 바쁜 명절이었다. 식량난에서 해방되면서 지금은 2모작을 거의 하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추수 끝나기가 무섭게 보리 파종을 했다. 추위가 닥치기 전에 파종을 끝내야 했기 때문에 벼를 타작하는 일도 미루고 보리 파종부터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죽 바빴으면 “죽은 송장도 일어나 일한다”는 말이 나왔을까. 그런 수고 끝에 우리 농부들은 무르익은 5월의 보리밭 길을 콧노래를 부르며 거닐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추석에 만난 가족과 친지들에게서 ‘사오정(45세 정년이라는 뜻으로 조기퇴직을 빗대는 우스갯소리)’의 그늘이 부쩍 자주 목격된다. 50이 되기 전에 직장을 그만둔 친척이 적지 않다. 그나마 직장에 다니고 있는 또래 사촌도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고 푸념한다. 한창 일할 나이에 ‘은퇴’해서 놀고 있는 친척들을 보면서 그들의 경험과 ‘젊음’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적 낭비니 경제적 손실이니 하는 것을 따지기 이전에 저러다 제명까지 살 수는 있을까 하는 남 걱정 아닌 걱정까지 해본다.

국세청의 2008년 자료에 따르면 40대 근로 소득자 수가 337만 명으로 30대 434만 명보다 적다. 전체 인구에서 40대가 차지하는 비율이 30대보다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40대부터 직장을 잃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년퇴직이 아닌 명예퇴직 나이가 점점 앞당겨지면서 생긴 현상일 게다. ‘사오정’은 어느 새 우리 시대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한국 사람의 평균 수명은 80세다. 질병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산다는 건강수명도 71세(세계보건기구 자료)다. 45세에 직장을 그만둔다면 평균 수명까지는 35년, 건강수명까지만 계산하더라도 26년이란 긴 시간이 남아 있다. 결론은 ‘인생 2모작’밖에 없다. 늦깎이 가수나 할아버지 요리사, 파워 블로거나 공부방 도우미 등 뭐든지 좋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생활에 여유가 있다면 국내에서든 외국에서든 봉사 활동 하는 것도 권하고 싶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퇴임 후 29년째 ‘세계평화전도사’로 제2의 인생을 꾸리며 현직보다 더 빛나는 전직 대통령의 삶을 살고 있다.

칼럼을 쓰기 전 장사익에게 전화를 걸었다. 16년 전 과감한 결정을 내렸을 때 얘기가 듣고 싶어서였다. 체화된 그의 대답이 쏟아졌다.

“인생의 꽃을 피우는 일을 하고 싶었지유. 세상에 태어나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가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유. 그런데 나는 그 꿈을 찾은 거지유…. 너무 행복해유.”

그는 지난해 환갑을 넘겼다. 그래도 삶이 행복해서인지 목소리 하나는 풀 먹인 삼베처럼 칼칼하게 힘이 서 있다. 노래를 부르듯, 시를 읊듯 한마디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 출발해도 늦지 않았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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