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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순이 언니의 추석

중앙선데이 2010.09.18 23:32 184호 30면 지면보기
생일이 9월인 나는 추석 연휴와 생일이 겹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먹을 것 많은 햇살 좋은 계절에 태어나 네가 먹을 복이 많은 거”라고 돌아가신 할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어린 시절의 추석은 이제는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와 할머니가 보기 좋게 한복을 차려입은 모습 그리고 풍요로운 먹을거리의 기억으로 남는다. 생선전과 동그랑땡, 곶감과 송편….

그 많은 음식들을 단숨에 만들어 차례상에 올리던 복순이 언니도 떠오른다. 복순이 언니는 열일곱 살, 내가 한 살 되던 해 우리 집에 와서 11년간 같이 살다가 스물여덟 늦은 나이에 시집을 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시골에서 올라와 남의집살이를 하던 언니들은 모두 수퍼우먼들이었다. 아침 일찍 밥을 짓고 도시락 싸고, 하루 종일 빨래하고 청소하고 구공탄을 갈고…. 복순이 언니는 특히 더 수퍼우먼이었다. 별것 아닌 찬거리를 가지고도 음식을 잘해서 언제나 밥상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손님을 치르는 일에도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1960년대, 잡지를 다섯 개나 펴내던 아버지의 출판사는 겉으론 화려했지만 늘 경영난에 시달렸다. 월말이면 적지 않던 직원들의 월급을 걱정하느라 한숨을 쉬던 어머니의 곁에서 복순이 언니는 어린 나를 정성으로 보살펴주었다. 내수동 181번지, ‘막다른 골목 큰 대문집’이라 불리던 우리 집은 추석이면 유난히 음식을 많이 했다.

우리 집 여자들은 출판사 직원들, 아버지 손님들, 오빠 친구들, 외할머니를 뵈러 오는 친척들의 밥상을 차리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추석 전날이면 나는 부엌을 드나들며 금방 만든 송편과 동그랑땡을 주워 먹어서 하루 종일 배가 불렀다. 해마다 추석이면 하늘이 얼마나 푸른지, 어린 나는 배가 아무리 불러도 마음은 도리어 허기가 졌다.

추석 날 비가 온 적이 있었던가? ‘추석’하면 그저 파란 하늘과 어릴 적 한옥 마당을 내리비추던 보름달이 떠오른다.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동생이 태어났을 무렵, 우리 집에 열네 살 먹은 봉순이 언니가 새로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엄마와 아버지와 할머니와 오빠, 그리고 나와 내 동생, 복순이·봉순이 언니, 그렇게 여덟 명이 되었다. 그들이 가족이 아니라고 누가 말을 할 수 있을까?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이면 진짜 가족보다도 그들이 먼저 떠오른다.

얼마 전에 종영된 가족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을 보면서 옛날이 자꾸만 그리웠던 건 ‘식모 신세경’의 역할 때문이었다. 어쩌면 식모란 단어가 사라지고 가사도우미만 남은 세상은 철저한 계산 아래 이루어지는 냉정한 세상일지 모른다. 아무도 조금 더 일하려 하지 않고, 돈 받는 딱 그만큼만 일하는 세상, 추석에도 일하는 도우미는 거의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만큼 옛날보다는 합리적이고 공평한 세상이 오고 있는 건 참 반가운 일이다.

노처녀 복순이 언니도 시집을 가고, 봉순이 언니도 시골로 시집을 가서 부잣집 며느리가 되었다. 영리한 그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시집간 뒤로는 다시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마 잘 사는 모양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지”라고 하셨다. 복순이 언니는 지금도 가끔 먹을 것을 해가지고 우리 집에 들른다. 잘생긴 얼굴에 반해 시집간 남편은 평생 술을 아내보다 더 좋아해서 언니를 슬프게 했다. 얼마 전에는 작은딸이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마음고생을 하면서도 명절 때마다 절에 가서 수많은 사람들의 밥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고 한다.

그 옛날 언니가 만들었던 추석음식을 떠올리며, 문득 그 옛날 찬물에 손을 넣고 일하느라 빨개진 손, 그 고마운 손을 가끔 떠올리면 참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황주리 이화여대 서양화과,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에서 공부한 뒤 미국 뉴욕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개인전을 28회 열었고, 산문집 『날씨가 너무 좋아요』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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