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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lobal] 병원장이 된 파독 간호사 출신 의사 미라 박

중앙일보 2010.09.18 00:27 주말섹션 12면 지면보기
독일명 미라 박(60·사진). 본명은 박경남. “남쪽의 별이 가장 밝다”며 별 경(庚), 남녘 남(南)으로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그가 수십 년을 미라 박으로 살아온 이유는 역설적으로 ‘별처럼 빛나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독일에서 의사 공부 … 최선 정도가 아니라 목숨 걸고 했다”

1972년 1월, 스물 두 살의 박경남은 서울발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감색 치마 정장을 차려 입고, 옷가지가 든 가방 한 개와 함께였다. 일행은 그를 포함해 40명. 서독에서 일하게 될 간호사와 간호보조원이었다. 다른 이들은 가족들이 배웅 나와 눈물을 흘리며 딸과 누나·언니를 보냈지만, 그는 혼자였다. 가족 모르게 ‘파독 간호사’ 모집에 신청을 했고, 떠나기 전날 알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집안이 무척 엄했어요. 중·고교 시절엔 학교 외에는 외출이 허락되지 않았고, 여자가 대학에 가서 뭐하느냐며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게 했어요. 늘 가슴이 답답하고, 한국에서 뛰쳐나가야겠단 생각뿐이었어요. 해방돼 자유를 찾고 싶었지요.” 지난달 부산에서 열린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 대회에 참석한 그의 회상이다. 포항여중·고를 졸업하고 대구간호대학을 나와 서울대병원에 취업한 지 10개월 만에 독일로 간 것이다.



함부르크의 종합병원인 AK알토나병원의 외과 병동에 배정됐다. 환자들의 수술 부위를 소독하고, 실밥을 뽑고, 시트를 갈았다. 비번일 때는 영화관에도 가고, 수영도 배우고, 독일어 공부를 하면서 자유를 만끽했다. 기숙사에서 살면서 알뜰하게 모은 돈은 고국으로 송금하기도 했다. 일상적인 업무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병상 1000개가 넘는, 최신식 시설을 갖춘 병원이라 근무 환경이 좋았고, 환자들도 동양에서 온 간호사들을 귀엽게 봐줬다. 발음하기 어려운 그의 이름 대신 “로터스 블루메(연꽃)”라고 부르는 환자도 있었다. 정작 그를 힘들게 했던 건 허드렛일이었다. “밥을 나르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게 힘들었어요. 동생들 기저귀 한번 갈아보지 않았거든요. 철이 없을 때니까, 변기 들고 다니는 게 고역이었고 창피했어요. 외국까지 와서 식모보다 못한 것 아닌가… 제 신세가 처량했어요.” 당시 독일의 간호사는 의료 전문인력보다는 실업학교를 나온 기능 인력으로 인식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파견 계약기간 3년이 지났을 때 자유를 향한 갈망이 도졌다. “평생 변기를 들고 다녀야 한다는 걸 참을 수 없었어요. 병원 일은 좋았지만, 의사의 지시에 따라야만 하는 것도 싫었고요. 이젠 내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지요.”



의대에 여러 차례 지원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독일 의대는 고교 3학년에 해당하는 13학년의 내신성적으로 신입생을 뽑았는데, 초·중·고 과정이 12년인 한국의 학력을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13학년 성적을 잘 받아오면 가능할지 모른다는 설명을 듣고 야간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31세 때였다. 주경야독 끝에 함부르크 의대에 합격했는데, 주변의 반대는 심했다. “열살 이상 어린 애들도 힘든 게 의대 공부인데, 나이 든 네가 할 수 있겠느냐”며 걱정을 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두 번 낙제하면 졸업을 ‘기브 업(포기)’해야 하고, 예과에서 본과에 올라 갈 때 학생의 50%를 탈락시키기도 했어요. 오죽하면 독일 학생들이 데모를 했겠어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최선을 다한 게 아니라 생명을 걸고” 공부했다. 6년제인 의대에서 한 번 낙방하고, 7년 만에 졸업했다. 의대 다니는 친구와 연애를 하면서 아이를 갖게 됐는데, 아들을 출산한 그해에 낙제를 했다. 의대 시절은 시간과의 전쟁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교과서를 한 번 읽을 때 그는 서너 번 읽어야 했다. 싱글맘으로서 육아는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학비는 공짜였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생업 전선에도 뛰어들었다. 아기 때문에 간호사 야간 당직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게 되자, 영화 엑스트라, 광고 모델 등 동양인 얼굴이 필요한 곳에 출연했다.



의대를 졸업하면서 독일 시민권을 신청했다. 현지에서 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담당 공무원이 제 이름이 너무 어렵다며, 매우 ‘유러피언’한 이름을 하나 정하라고 해요. 욕탕에 앉아 이것저것 생각하는데, 독일 이름들은 영 마음에 와 닿지 않아요. 갑자기 미라클, 기적이란 단어가 떠올랐어요. 그런데 이름으론 좀 이상하잖아요. 미라클, 미라, 미라…. 아주 유럽적이고, 독일 사람들도 좋아할 것 같고, 한국에서도 인정할 것 같았어요.” ‘미라’라는 이름은 기적 같은 인생을 산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었을까.



그는 함부르크에서 차로 30분 떨어진 교외에서 의원을 운영한다. 독일인 의사와 동업해 개원했고, 보조의사 한 명을 더 두고 있다. 진료 분야는 정형외과와 가정의학과. 그는 인공관절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받은 정형외과 박사이기도 하다. 침을 놓기도 하며 동·서양 의학을 조화롭게 운영하는 게 병원의 특징이다. 2~3개월 전에 예약해야 진료받을 수 있을 정도로 환자가 많다. 무료 봉사도 한다. “독일은 내게 많은 기회를 준 곳이잖아요. 조금 더 갚고 난 뒤, 한 10년 후쯤 은퇴하면 한국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싶어요.”



41세에 의사가 된 그에게, 늦었지만 인생을 바꿔보고 싶은 이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다.



“늦었다는 생각 안 들었느냐고요? 천만에. 이 인생에 못 하면 다음 생에 또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 인생에 아무것도 안 하면 다음 생엔 아무것도 없어요. 주저하면 안 돼요. 주저하는 마음이 있으면 포기하는 게 나아요. 욕망과 희망을 가슴에 담고, 모든 힘과 노력과 정성을 다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경험했잖아요. 그런데, 하려면 100%를 해야 해요. 아, 99%해도 돼. 그럼 하늘이 1%를 도와줄지도 몰라요. 80%쯤 해 놓고 많이 했다고 하면 안 돼.”



그는 어려서 집안에서 겪은 차별이 오히려 자기에게 힘이 됐다고 했다. “남동생과 나를 차별하는 집안 분위기 때문에 그때는 내가 정말 불행하다고 생각했어요. 여자로 태어난 게 너무 억울했죠. 그런데 그런 시련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어릴 때 고생한 게, 그게 참 감사해요. 고생하는 사람을 무조건 불쌍하다고만 여길 게 아니라, 적절한 동기부여와 기회를 만들어주는 게 참 중요합니다.”



글=박현영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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