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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사 무술의 적통(嫡統)을 잇는다, 사부 후정성

중앙일보 2010.09.18 00:23 주말섹션 12면 지면보기
지난 8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 제34차 회의에서 중국 허난(河南)성 등펑(登封)시 숭산(崇山) 일대 역사기념물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는 소식이 타전됐다. 중국인들은 환호했다. 그 대상인 11개 고(古)건축물에 소림사(少林寺)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중국의 전통 무술을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를 잡은 때문이었다. 소림 무술은 이미 수많은 영화와 무협소설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1982년 개봉된 리롄제(李連杰) 주연의 영화 ‘소림사’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그해에만 70만 명이 소림사를 다녀갔고, 84년에는 347만 명이 방문했다. 지금은 ‘소림’ 두 글자만으로 세계적 브랜드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소림 무술의 적통(嫡統)을 잇고 있는 후정성(胡正生·34)을 만나 소림사의 모든 것을 들어본다. 장소는 그가 운영하는 ‘소림사전통무술학원’에서였다.


내공으로 돌멩이 깰 수 있죠 … 하지만 그건 무술이 아니지요

등펑(중국)글=이만훈 월간중앙 기획위원

사진=최재영 월간중앙 사진부장



“재력만 있으면 선생을 고용해 무술학교를 차릴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무술을 모르는 사람이 학교를 운영하다 보니 아무래도 당장 돈을 벌 목적으로 ‘쇼’적인 것을 많이 가르치도록 주문합니다. 이건 무술을 망가뜨리는 짓이지요.” 일성은 소림 무술의 상업화에 대한 걱정이었다.



후정성은 젊은 편이다. 하지만 무술 경력이 22년째로 주위에선 ‘사부(師傅)’라 불린다.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얘기다. 후 사부가 정식으로 무술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지만 소림사 무승(武僧)을 가르치는 유일한 ‘마스터’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그는 족보상으로도 소림 무술의 적통에 속한다. 그는 올 6월 80세를 일기로 타계한 양치우(楊啓吾) 선생을 사사했다. 양 선생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 마지막 소림 무승이었던 더건(德根·1914~70)으로부터, 더건은 민국 시절 피폐해진 소림 무술의 맥을 잇게 한 우산린(吳山林·1875년 생)으로부터 각각 전수받았다. 우산린은 청조 말기를 풍미했던 소림사 무승 출신 아버지 지친(寂勤·법명)에게서 무술을 배웠다. 지친은 여섯 살에 소림사에 들어가 무술을 배우며 수행하다 서른아홉에 환속해 아들 우산린을 낳았다. 즉 후 사부는 지친→우산린→더건→양치우로 이어진 정통 소림무맥(少林武脈)의 전승자인 것이다.



부모의 굴욕 갚고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



그는 소림사가 있는 등펑시로부터 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허난성 신양(信陽)시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땅뙈기라곤 메뚜기 이마빡만큼도 없어 남의 땅을 부쳐 근근이 입에 풀칠하는 처지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존심이 강했다. “극빈의 부모가 남들한테 업신여김을 당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주먹을 불끈 쥐곤 했습니다. 누나가 한 명 있었지만 부모의 굴욕을 갚고 집안을 일으키는 것은 나의 몫이라고 늘 생각했지요.” 마침내 초등학교 5학년 때인 89년 9월 식구들 몰래 가출했다. 리롄제의 영화 ‘소림사’를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던 그는 “잘하면 리롄제나 청룽(成龍) 같은 쿵후 스타가 돼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리란 생각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몇 달 동안 부모님 심부름을 해서 모은 돈으로 버스를 타고 등펑까지 와 무작정 소림사로 찾아갔습니다. 당시 소림사가 영화 ‘소림사’를 계기로 다시 부활하던 참이라 일손이 많이 필요할 때였죠. 잔심부름이라도 시킬 요량으로 순순히 받아주었습니다.”



그가 소림 무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입사(入寺)한 지 한 달쯤 지나서부터였다. 당시 소림사에는 걸출한 고수가 한 명 있었다. 바로 장광쥔(張廣俊) 선생이었다. 장 선생은 70년대 각종 무술대회에서 금상을 휩쓴 당대의 고수로 지금도 ‘중국 10대 무술명사(冥뵨)’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후정성이 소림사를 찾아갔을 때는 일흔일곱의 노인이었다.



“어느 날 사부님을 찾아가 무술을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힘들 텐데 괜찮겠느냐’고 하세요. 그래서 소림사를 찾아온 자초지종을 말씀 드렸지요. 제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시더니 ‘해보자’ 그러시더군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부께서는 그동안 제가 일하는 걸 지켜보셨던 모양이에요. 저는 혹여 쫓겨날까 봐 누가 일을 시키든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했는데 사부께서 그 점을 사주신 것 같습니다.”



소림사 무승들이 무공을 닦은 흔적. 은행나무에 팬지공(指功) 구멍들이다.
낮에는 일하고 아침 두 시간, 저녁 서너 시간씩 무술 공부를 했다. 어차피 작심한 일이라 죽자 사자 매달렸다. 사부가 다른 용무로 자리를 비울 때에도 혼자 연습했다. 특히 저녁 공부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다 사부가 가서 자라고 해야 그제야 그만두곤 했다. 옷이 달랑 한 벌이라 매일 밤 빨아 널었다 아침에 입어야 하는데 어떤 때엔 채 마르지 않아 그대로 입고 일을 해야 했다. 하루 너덧 시간밖에 자지 못해 낮에 일을 하다 서서 잔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하루 세 끼는 꼬박꼬박 챙겨 먹지만 늘 허기가 졌다. 집에서 가뜩이나 잘 먹지 못해 앙상했던 몸이 절에 들어갈 때보다 더 말랐다. 그래도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6년 장 사부에게 사사했다.



“1994년 겨울 사부께서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습니다. 당시 여든두 살이셨거든요. 하루는 저를 부르시더니 심의육합권(心意六合拳)이라는 소림 무술의 비급과 함께 편지를 써주시며 양치우란 분을 찾아 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힘에 부치니까 다른 고수를 소개해주신 겁니다. 사부님은 2년 뒤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양 사부는 소림사에서 30여 분 걸리는 옌스(偃師)시에서 전통 의원을 하고 있었다. 대대로 의원을 하던 집안 출신인 양 사부는 더건 선사의 수제자로 문화혁명 이전 소림사 방장을 지낸 더산(德禪) 선사로부터 의술을 배워 인근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무술과 의술에 정통한 명사였다. 장 사부의 소개 편지를 건네며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양 사부는 몇 가지 동작을 시켜보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겠다는 표시였다. 그의 무술 인생이 소림무맥의 적통으로 편입되는 순간이었다.



가장 추울 때와 가장 더울 때 단련하라



당시 소림 무술 최고의 고수로부터 40년 가까이 꼼꼼한 지도를 받은 덕에 양 사부의 실력 또한 생전에 짝을 이룰 자가 없었다고 그는 강조했다. 양 사부의 무명(武名)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올 6월 그가 세상을 뜨자 싱가포르의 한 TV가 장례식을 사흘간이나 생방송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양 사부는 우선 ‘동련삼구 하련삼복(冬練三九 夏練三伏·가장 추울 때와 가장 더울 때 단련하라)’이라는 무술계의 오랜 격언을 일러주며 “이런 고통을 겪지 않고는 진정한 전수는커녕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말로 가르침을 시작했다. 스승은 무술뿐만 아니라 글도 가르쳤다. 예전과 같이 절 생활을 하면서 ‘공부’하려니 힘들기 짝이 없었지만 죽기 살기로 했다. 소림사와 사부 집을 오가며 그렇게 4년을 보낸 뒤 98년부터는 아예 절을 나와 무술 공부에만 매달렸다. 농가를 빌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로지 무술만 했다. 워낙 양 사부가 유명했던 터라 그의 제자에 대한 소문도 퍼져나갔다.



양 사부를 사사한 지 8년쯤 된 2002년 그에게도 배움을 청하는 학생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엔 아직 자신도 미진하다는 생각에 한참을 망설였다. 스승한테 물으니 “가르치다 보면 스스로에게도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라며 허락했다. 처음 다섯 명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나날이 학생 수가 늘어나더니 2005년 무렵 어느덧 200명이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인근에 버려져 있던 옛 무기공장을 빌렸다. 1만3223㎡(4000평) 대지에 건물을 수리해 사무실과 숙소·교실·식당 등으로 꾸미고 정식으로 무술학원 간판도 내걸었다. 이듬해 소림사로부터 소림사 무승을 훈련시켜 달라는 요청과 함께 ‘무승기지(武僧基地)’로서의 특별지위를 얻었다. 형식적으로도 소림 무술의 적통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손길을 거쳐 간 제자가 여자 20여 명을 포함해 외국인 300여 명, 중국인 500여 명 등 줄잡아 800여 명(방학을 이용해 캠프 형식으로 맛만 본 단기 연수자 제외)은 된다. 외국인 유학생과 관련해 그를 더욱 유명하게 한 일화 한 토막이 있다.



“2005년 초여름 23세의 이스라엘 청년이 학교로 찾아왔어요. 이스라엘 특전대 출신으로 일본에서 가라테와 이종격투기(K1), 중국에 와서 태극권을 배웠지만 성에 차지 않는다며 느닷없이 한판 붙어보자는 거예요. 몇 번을 사양하다 하도 조르기에 하는 수 없이 응해줬죠. 마음대로 공격해보라고 하니까 덤비는데 단 한 수로 제압해 버렸습니다. 삼 합을 겨뤘지만 똑같은 수로 당하고 나니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하더군요. 꽤 부잣집 아들인데 그 길로 제 밑에서 꼬박 3년을 공부하고 돌아가 이젠 예루살렘에서 도장을 운영하며 소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따금씩 제가 지어준 ‘무적(無敵)’이란 중국식 이름으로 e-메일을 보내오곤 합니다.”



진정한 고수는 기술보다 깨달음이 있어야



스스로 고수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아직 멀었다”고 답했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고수가 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과 노력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 15년은 죽어라 해야 됩니다. 10년 정도면 기술적인 측면에서 웬만한 동작은 다 익힐 수 있어요. 하지만 그 기술들을 구애 없이 자유자재로 구사하려면 스스로 무술에 대한 깨달음(悟)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최소 5년은 더 걸립니다. 누구나 배울 수는 있으나 깨닫는 건 참 쉽지 않습니다. 이 정도는 돼야 스승한테 인가를 받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는 “세계의 각종 무술과 교류할 수 있는 기지로서 ‘소림무술촌’을 차리는 게 앞으로의 꿈”이라고 덧붙였다.



가까이서 본 후정성



후정성 사부는 얼핏 보아도 소림 무술가답다. 승려처럼 머리를 삭발했다고 그런 게 아니라 1m78㎝의 후리후리한 키에 군살이라곤 하나 없는 몸매(70㎏)가 그렇다. 온화하게 웃는 모습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포스가 느껴지는 인상이 그렇다. 술과 담배도 하지 않는다. 공력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도 새벽 5시2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제자들과 함께 10㎞ 달리기를 시작으로 매일 9시간씩 운동장에서 보낸다. 시범을 보일 땐 ‘황비홍’이 따로 없다. 한마디로 펄펄 난다. 노동치곤 중노동이다. 그래도 무술을 시작한 이래 감기 한 번 걸려본 적이 없다. 금강체(金鋼體)다. 그는 마음 다스리기에도 고수다.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닥쳐도 고요함을 유지한다. 소림 무술의 정화(精華)를 보는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중앙 10월호 참조




j 칵테일 >> 후정성의 소림 무술 Q&A



Q=전해지는 비급을 갖고 있나.



A=장광쥔 사부께서 주신 ‘심의육합권’ 외에도 내가 보관 중인 것만 10여 종이나 된다. 심의파, 포권, 미제곤 등 소림 무술의 핵심에 관한 것들은 다 비급이 있다. 용(龍), 범(虎), 표범(豹), 뱀(蛇), 학(鶴) 등 다섯 동물의 동작을 본떠 만들었다는 ‘소림오권’에 대한 것도 있다. 양치우 사부께서 물려주신 ‘권법적요(拳法摘要·사진)’는 청나라 때인 1700년대 왕즈청(王志誠)의 작품이다. 다 손으로 쓴 원본들이다.



Q=이른바 살수(殺手)도 있나.



A=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지 사실은 모든 수가 살수다. 힘을 안 쓰고 내공으로만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장풍은 거짓이다.



Q=세계에서 가장 센 10대 무술 가운데 소림 무술이 1위로 꼽힌 적이 있다.



A=다른 무술은 힘 쓰는 법을 중시하는 데 반해 소림 무술은 힘을 빼는 법을 먼저 가르친다. 무술을 연마하면서 힘을 무(無)의 상태로 가다가 외부로부터 기를 빨아들여 순간적으로 폭발력을 발휘한다. 또 일정한 형식이 없기 때문에 실제 대련에서 막강한 거다.



Q=내공으로 돌멩이도 깰 수 있나.



A=물론이다. 하지만 무술시범을 보일 때도 그런 건 안 한다. 그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일 뿐 진짜 무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무술을 할 때 그런 것들은 아무 필요가 없다.



Q=돌멩이를 깨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A=화가 날 때 머리칼이 곤두서듯이 근(筋)·골(骨)·육(肉)·혈(血)이 기(氣)와 합치되면 순간적으로 엄청난 힘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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