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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View] 성석제의 인생 도취

중앙일보 2010.09.18 00:18 주말섹션 14면 지면보기
내가 술이 무슨 맛인지 조금이라도 알게 된 건 할머니가 집에서 빚은 막걸리 덕분이었다. 할머니는 모내기, 김매기, 추수 같은 농번기나 특별한 일이 있어서 일꾼들에게 주기 위해 막걸리를 빚었다. ‘맥주 순수령’처럼 ‘막걸리 순수령’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할머니는 막걸리의 재료로 쌀, 누룩, 물 외에는 쓰지 않았다.


‘막걸리, 내가 아는 모든 술의 조상’

밀주 제조를 금하는 법 때문에 막걸리를 많이 빚지도 못했다. 일꾼들이야 대개 품앗이를 하는 사람들이라 서로 잘 아는 사이이긴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이지 누구네 집에서 술을 빚는다는 게 소문이라도 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불시에 나오는 ‘나무 조사’(당시 ‘당국’에서는 산림녹화의 취지에 맞춰서 산에서 연료로 나무 등속을 해오는 것을 엄금하고 있었고, 조사를 하러 온 요원들이 동네에 출몰할 때면 공포 분위기에 사로잡히곤 했다)와 쌍벽을 이루는 ‘술 조사’를 받게 될지도 몰랐다.



누룩이며 엿기름(사투리로 ‘엿질금’이라고 부르고 주로 겨울철에 식혜나 조청을 만들 때 썼다)은 집에서 만들지 않고 장날 집으로 돌아오는 할아버지 손에 들린 고등어 한 손, 쇠고기 한 근 사이에 슬쩍 섞여서 입수되었다. 이 엄청난 막걸리 불법 밀조가 당국에 적발될 경우 호적에 ‘빨간 줄’이 쳐질지도 모르는 터였다. 그런 데 대한 두려움을 모르던 어린 나는 할머니의 비밀스러운 대사에 조수로서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먼저 누룩을 덩어리가 없이 잘 부수어 마루 위에 널어놓는 게 막걸리 제조의 시작이다. 고두밥을 짓기 위해 깨끗이 씻은 가마솥 위에 물을 붓고 시루를 그 위에 얹는다. 솥과 시루 사이를 밀가루 반죽으로 발라 틈이 없게 한다. 시루에 씻어서 물에 담가둔 쌀을 켜켜이 넣는다. 불장난을 좋아하던 내가 궁둥이를 쳐든 채 아궁이에 머리를 집어넣다시피 하여 불을 붙인다. 할머니는 ‘나무 조사’에서 살아남은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불이 세고 오래 가는 장작을 아궁이 속에 넣는다. 이처럼 술을 빚을 때는 언제나 내게 합법적인 불장난의 소임이 주어졌던 것이 매력적이었고 아직 어린 내가 무슨 일을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성취감을 주었다.



고두밥이 지어지면 넓은 데다 펴서 식힌다. 미리 준비한 누룩과 잘 섞는다. 내가 솥과 시루 사이의 접착제 역할을 마친 밀떡을 우물거리는 동안 할머니는 깨끗하게 씻어 말린 항아리에 누룩과 잘 버무려진 밥을 차곡차곡 집어넣는다. 깨끗한 물을 부은 뒤 면포로 항아리 주둥이를 덮고 뚜껑을 닫는다. 이제 항아리는 안방 아랫목에 모셔진다.



며칠 동안 항아리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엉성한 자세가 아니라 안방 차지를 한 임금처럼 아랫목에 떡하니 서 있다. 거기에 관해서 관심을 표시하는 사람은 없다. 관심이 있어도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묵계가 있었던 것 같다. 어떻든 우리 집 열 명이 넘는 식구 중에서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은 읍내 사무실에 출퇴근하던 아버지가 유일했고 그나마 집에서는 술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집안에서 가장 어른인 할아버지가 평생 단 한 잔의 술도 마시지 않았다.



며칠 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책가방을 사랑방 앞에 던져놓고 펌프가 있는 우물가로 간다. 힘이 부족한 내가 몸무게까지 이용하느라 팔짝팔짝 뛰며 펌프에서 물을 솟게 하는 동안 드디어 항아리에서 나온 걸쭉한 밑술이 함지 위 나무판에 걸쳐진 체에 따라진다. 할머니는 체를 흔들어 술을 거르고 또 항아리에서 독한 원주를 체에 따라서 거르고 거른다. 막, 막, 막.



“아이고 우리 손자 고생 마이 했네. 이 술 한 분(번) 마셔보게. 잘 됐는가, 못 됐는가.”



할머니는 ‘복(福)’자가 써진 사기그릇의 밑바닥이 보이도록 술을 조금만 퍼서 권한다. 나는 ‘어른이 주는 술은 마셔도 된다’는 경구를 인용해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면서 마신다. 정말 딱 한 모금만.



“술이 퍽 싱거운 거를.”



나는 뭘 아는 사람처럼 말하고 할머니는 막걸리에 물을 더 부어댄다. “일하민서 술기운만 실쩍(슬쩍) 맛을 보고 힘이나마 됐지, 뭘. 취해서 지정(주정)할라고 술 처먹나” 하면서. 그 말씀은 지금도 유효하다. 나는 주도(酒道)의 모든 것을 술 못 드시는 할머니에게서 배웠다. 추석 차례 때 할아버지는 제사와 달리 맑은 술이 아닌 막걸리를 제주로 쓰곤 했다. “차례는 천신(薦新)이니라” 하는 말씀과 함께. 이제 그 뜻이 뭔지 알 듯하다. 추석 달처럼 둥그런 얼굴의 할머니, 그 술도 빚으셨을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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