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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은…] 시각장애인도 책으로 세상 만나고 싶다

중앙일보 2010.09.18 00:17 종합 29면 지면보기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면 교수연구실에 종종 신간도서가 배송되곤 한다. 그러나 신간도서를 받을 때마다 그 책을 곧바로 읽지 못하고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시력이 전혀 없는 필자로서는 점자 또는 음성매체가 아니면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 가끔 보내주는 신간 도서 목록이 좌절감을 느끼게 할 때도 있다. 신간도서 한 권을 읽기 위한 고민이 몇 곱절로 증폭된 결과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점자도서나 녹음도서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점역사와 교정사가 일일이 점자로 책을 입력하거나 녹음 자원 봉사자가 육성으로 녹음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점자도서나 녹음도서를 제작하는 데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것은 불가피했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들어선 지금은 점자도서나 녹음도서를 제작하는 새로운 길이 있다. 출판 과정에 만들어지는 디지털 파일이 점자나 음성매체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 활자를 읽을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 디지털 파일을 구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해당 파일로 출판된 도서를 점자 또는 음성매체로 변환해 읽을 수 있다.



자유로운 독서를 위한 새로운 길은 있지만 시각장애인들은 아직 그 길을 갈 수가 없다. 2009년에 디지털 파일을 시각장애인 등을 위한 전용 기록 방식으로 복제·배포 또는 전송할 수 있도록 저작권법이 개정됐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장애인들을 위해 필요한 경우 출판사나 발행사에 디지털 파일 형태의 도서자료를 납본하도록 요청할 수 있는 규정도 마련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출판사와 저작자는 디지털 파일의 외부 유출을 우려해 시각장애인들에게 디지털 파일을 제공하기를 망설이고 있다. 기술적 보호 수단도 있고, 법과 제도도 정비됐지만 시각장애인은 여전히 읽고 싶은 책을 선택해 원하는 시간 내에 구해 볼 수가 없다.



미국 베네텍이라는 단체에서 운영하는 ‘북셰어 온라인도서관’(www.bookshare.org)에는 출판사와 저자 등이 매월 500종의 신간도서 원본 파일을 기증한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디지털 강국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에 사는 시각장애인들은 언제까지 미국을 부러워하며 살아야 하는가?



늦었지만 최근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장애인도서관지원센터에서 지식나눔의 장으로 운영하는 ‘소리책나눔터’에 뜻있는 몇몇 작가들이 디지털 파일 도서를 기증했다. 기증 활성화를 위하여 ‘소리책나눔터 포털’(nanum.dibrary.net)도 운영한다고 한다. 개안 수술을 위해 각막을 기증한 분들도 고맙지만 신간도서의 디지털 파일을 기증한 분들도 그만큼 고맙다.



시각장애인은 비록 눈으로 사물과 사람을 보지 못하지만, 책을 통해서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신간도서의 기증 활성화가 이뤄져 25만 시각장애인들도 보다 빨리 신간도서를 접하는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김영일 조선대 특수교육과 교수 시각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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