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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민의 ‘지도자 크기가 나라 크기다’

중앙일보 2010.09.18 00:16 주말섹션 15면 지면보기
세상 모든 것은 흥할 때가 있으면 망할 때가 있으며, 성할 때가 있으면 쇠할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국가나 산업이 그렇지요. 기업이나 직업도 떠오를 때가 있으면 가라앉을 때가 있으며,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는 법이지요. 정치인은 어떤가요?


대중과 뭔가 다른 게 없다면

여전히 으뜸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나요? 정치인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힘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요. 정치가 대화 주제가 되면 사람들은 욕부터 시작하지요. 정치인을 존경하는 사람들도 꽤(?) 있겠지만 내놓고 그렇게 말하는 바보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여론조사를 하면 나쁜 수치는 죄다 정치가 차지합니다. 압도적 1위지요. 가장 부패한 집단, 가장 불공정한 집단, 가장 신뢰가 가지 않는 집단, 가장 생산성이 떨어지는 집단, 가장 법을 지키지 않는 집단 등등. 그러니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인은 국민 위에 군림하면서 막강한 권력으로 온갖 나쁜 일은 도맡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정말 정치인이 그렇게 힘이 센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치는 몰락하고 있고, 정치인의 지위는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대중을 지배하기는커녕 대중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합니다.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 공간에서 정치인들은 지도자가 아니라 왕따를 두려워하는 힘없는 학생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시시콜콜한 일상사까지(김태호 총리 후보자는 라면을 끓이다 태운 이야기도 올렸지요) 보고(?)하면서 대중이 선도하는 문화를 따라가려고 애쓰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옛날에는 정치인의 위세가 정말 대단했었지요. 우리는 세상을 정치·경제·사회·문화로 분류하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정치는 당연한 듯 맨 앞자리를 차지했지요. 지금도 그럴까요? 사람들은 습관대로 여전히 그 순서대로 나열하고 있지만 이미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경제가 제일 앞인지, 아니면 문화 혹은 과학기술이 제일 앞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치가 맨 앞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정치는 더 이상 역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마흔이 넘은 분들은 1987년 대통령 선거 때를 기억하시겠지요. 노태우·김영삼·김대중의 연설을 들으려고 여의도광장에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왔지요. 그로부터 16년 전인 71년 장충단 공원에 박정희·김대중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인 인파도 그 못지않았지요. 그로부터 16년 전인 55년에도 한강 백사장에 신익희 연설을 듣기 위해 30만 명이나 몰려 흑사장이 됐다지요. 당시 서울 인구를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일 아닙니까. 거의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었지요. 지금은 어떨까요? 아무리 인기 있는 정치인도 10만 명은커녕 1만 명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한때는 정치인과 악수하고 사진을 찍으면 가문의 영광(?)이던 시절도 있었지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인천공항에서 대선 후보를 지낸 거물 정치인과 김연아가 동시에 나온다면 누구에게 달려가겠습니까? 안철수와 같은 기업인이나 박지성 같은 스포츠 스타들, 혹은 김태희나 이병헌 같은 영화배우들이 정치인의 인기를 압도합니다. 인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영향력도 다를 게 없습니다. 솔직히 중고생이나 대학생들도 정치인보다는 한비야를 비롯해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는 인사들의 영향을 더 받지 않을까요?



지난해에 서울의 어떤 대학이 학과 구조조정을 하면서 정치학과를 없앴습니다.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학과였던 정치학과의 몰락을 보여주는 충격적 사건이었습니다. 정치인을 꿈꾸는 청소년들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 TV 뉴스에서도 정치 뉴스는 점점 줄어들고 순서도 뒤로 밀립니다.



디지털 혁명 덕에 정치인과 대중은 이제 정보력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정치인의 결정적 무기가 없어진 것입니다. 인터넷과 모바일혁명 탓(?)에 정치인들의 언행이 실시간으로 노출되면서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정치인들이 높은 하늘에 있을 때는 그들을 끌어내리려 애썼던 대중이 그들이 드디어 땅에 내려오자 자기들과 똑같은(?) 모습에 실망하고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인은 이제 자기들의 지도자가 아니라고 생각한 거지요.



그러나 이런 시대는 오래 못 갑니다. 대중은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안해지면 자신들과는 뭔가 다른(!) 지도자를 다시 찾게 됩니다. 자기들을 쫓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끌어주는 지도자 말입니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지요. 그럼, 누가 그런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요? 대중보다 더 깊은 지식을 갖고 있으며, 더 치열한 논쟁을 할 수 있으며, 더 뛰어난 글을 쓸 수 있으며, 더 품격 있게 말할 수 있는 정치인이 지도자가 되겠지요. 대중과 다른 것이 없으면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정치컨설팅 ‘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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