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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2-3

중앙일보 2010.09.18 00:02 주말섹션 10면 지면보기
혜련의 회상에 따르면, 그날 이미 은발이 희끗희끗해진 큰 이모 에레나는 무슨 엄중한 심문관 또는 이번에는 반드시 묵은 빚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결의로 찾아온 채권자와도 같은 태도와 표정으로 현관을 들어섰다. 그 사이 삼십대 후반이 된 막내 이모 올가도 혜련이 보기에는 큰 이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니처럼 강경하지는 않았지만, 올가 이모 또한 어떤 상황이 되어도 에레나 이모 편에 서서 그 충실한 조력자 내지 응원군의 역할을 하겠다는 결의만은 분명히 보여주었다.


“어머니, 왜 일리야만 데리고 떠나셨죠?”

그래서인지 혜련은 이모들이 누르는 초인종 소리가 집안을 온통 휘저어 놓을 때까지 자신의 방 안에 고요히 기다리고만 있던 외할머니에게서도 엄한 심문관을 기다리는 피(被)심문인 또는 변제할 가망 없는 채권 추심을 기다리는 채무자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 없는 기억이긴 하지만, 혜련의 어머니도 요란스런 심문대비로 자신의 불안이나 죄책감을 진정시키려는 종범(從犯) 또는 강제집행을 앞둔 연대보증인 같은 데가 있었다고 한다.



일러스트: 백두리 baekduri@naver.com
오래 헤어져 있던 혈육들의 재회가 감동을 주는 첫 번째 대목은 서로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맞다 맞아 너야. 그간 얼마나 고생했니, 여기 이 흉터 해방 이듬해 감꽃 목걸이 만든다고 뛰어다니다가 묵은 감나무 가지에 찢긴 거지…… 80년대 초 한 공영방송이 이산가족 상봉 실황을 방영할 때 가장 먼저 시청자의 콧등을 시큰하게 만든 것은 그런 이산가족들의 확인과정이었다. 그러나 혜련의 외할머니와 이모들 모녀 간의 상봉에서는 그마저도 없었다.



초인종에 억지로 불려 내려온 듯 거실로 들어선 혜련의 할머니는 잠시 멈칫 놀라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내 차갑다고 할 만큼 차분한 눈길로 두 딸을 바라보면서 가만히 걸음을 멈추었다. 에레나 이모 또한 한눈에 외할머니를 알아보는 것 같은데도, 달려가 어머니를 쓸어안거나 눈물을 뿌리는 일은 없었다. 외할머니와 마찬가지로 굳은 듯 발길을 멈추었는데, 헤련의 기억에는 잠시 얼굴이 핼쑥해진 게 차이가 날 뿐이었다.



부엌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 나온 혜련의 어머니는 잘 기억이 나지 않은지 긴가민가한 얼굴로 그런 둘을 바라보았고, 올가 이모는 그보다 더 몽롱한 눈길로 기억에는 전혀 남지 않은 어머니와 언니를 바라보았다. 외할머니와 에레나 이모와 마찬가지로 그들 자매에게도 30년이 넘는 세월 두 대륙을 헤매고 한 대양을 건너 만나게 된 혈육끼리 느끼는 감격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만찬 시간으로는 아직 일러 찻잔을 놓고 둘러앉은 거실의 테이블 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엇 때문인가 안절부절못하며 거실과 부엌 사이를 들락거리는 혜련의 어머니를 빼고 둘러앉은 그들 세 모녀의 대화도 천만 리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몇십 년 만에 만난 혈육들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큰 이모 에레나는 막내 올가를 증인 겸 보조해설가로 쓰며 그로부터 한 시간 가까이 그리로 찾아오기까지의 괴롭고 쓰라린 행로를 얘기했는데, 곳곳에서 과장의 혐의가 드는 어조와 표정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기는 혜련의 외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두 딸이 서로의 증인이 되고 기억을 보조해가며 리투아니아를 떠나는 순간부터 미국에 이르기까지의 긴 얘기를 맺는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반문이나 대꾸로 얘기의 흐름을 끊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동에 젖거나 탄식과 회한에 넋을 놓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야릇한 호기심으로 테이블 끄트머리에 앉아 듣고 있던 혜련은 그런 외할머니에게서 왠지 닥쳐올 환란을 기꺼이 받아들일 각오를 다지고 있는 듯 느껴지는 어떤 결연함까지 찾아볼 수 있었다. 저녁 준비를 핑계로 거실을 들락거리는 어머니에게서 느껴지는 불안이나 까닭 모를 죄의식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의 반전이었다. 그러다가 끝내 에레나 이모의 심문 또는 채권 추심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머니, 그때 어째서 저 아이 일리야만 데려가고 저희들은 남겨두셨지요?”



“글쎄다. 하도 다급한 상황이라 이것 저것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번에는 외할머니가 갑자기 하얘진 낯빛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침착해지려고 애썼지만 목소리는 알아들을 만큼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만큼 에레나 이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때 우리 셋을 다 데리고 갈 수 없었다는 것쯤은 우리도 알아요. 하지만 데려가기 쉽다는 이유라면 가장 나이든 내가 되어야 했고, 어려서 가엽기 때문에 데려갔다면 저기 올가여야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가운데 일리야만 데리고 떠나셨어요. 왜 그러셨죠?”



“그때는 단순히 누구를 버려두고 누구를 데려간다는 식의 선택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의 공포에 쫓기던 이 어미에게는 너희 가운데 누구 하나를 그 죽음 속에서 건져내느냐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때는 아무 거침없이 너희 셋 가운데 하나만 살릴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일리야 저 아이라고 여겨 함께 데리고 떠났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었는지는 그 뒤 곰곰이 생각해봐도 영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에레나 이모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그러지 마세요. 어머니. 그때 어머니는 제게 저 올가를 잘 돌봐 주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올가의 손목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곧 데리러 오겠다고도 하셨죠. 그건 한 살이라도 많은 저를 남겨두어 어린 올가를 돌보게 하시려는 뜻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내가 어린 올가를 안고 떠나는 게 나에게도 너에게도 더 나은 선택이 되었겠지.



내게는 어중간한 여섯 살배기를 데리고 수천 수만 마일 이국으로 떠나기보다는 품에 안기는 세 살배기 올가가 차라리 나았을 것처럼, 네게도 아직 기저귀를 차야 하는 올가보다는 여섯 살배기 일리야가 돌보기 나았겠지.”



“그래도 뭔가 저희들을 두고 일리야를 데려갈 합당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더군다나 그렇게 저희들 중 누구를 데려가는 게 단순히 양육과 유기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가르는 선택이었다면요. 그 까닭을 들려주세요. 이건 어머니를 찾아 나서면서부터 저희 자매가 줄곧 묻고 싶던 것이었어요. 우리가 걸어온 길이 아무리 어려운 가시밭길이라 해도, 그것만 들으면 그 모든 고난을 잊을 수 있을 거예요. 아니, 그걸로 우리 둘의 삶 전체가 버림받은 상처에서 놓여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에레나 이모의 목소리는 전과 달리 어떤 절실함과 간절함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비정하리만치 차분한 목소리로 받았다.



“미안하다. 나도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면 너희들이 반드시 이걸 물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더욱 거짓말을 할 수가 없구나. 더구나 37년이나 걸려 두 대륙을 헤매고 대서양을 건너 여기까지 나를 찾아온 너희에게는…….”



그러고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도 에레나 이모는 여러 가지 말로 자신이 바라는 대답을 듣고자 했지만 헬렌의 외할머니는 끝내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그 오후 내내 안절부절못하던 어머니가 식탁에 저녁상을 차리는 것으로 안정을 되찾으려 할 무렵, 에레나 이모가 찬바람 도는 얼굴로 일어났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찻잔 앞에 앉아 간절한 눈길로 외할머니를 쳐다보고 있는 올가 이모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토막토막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올가, 가자. 이 할망구한테 우리는 - 이미 삼십여 년 전에 - 죽은 자식들이야. 자식을 죽을 구덩이에 팽개치고 - 떠난 할망구에게-구구하게 물어본들 뭐하겠어? 우리에게도 이 할망구는 - 그때부터 이미 어머니가 아니었어. 더는 찾아가야 할 - 어머니가 없어졌는데도 - 우리는 그렇게 멀고 험한 길을 돌아 - 여기까지 온 거야.”



한동안 망연한 눈길로 그런 에레나 이모를 바라보던 올가 이모가 얕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에레나 이모는 그런 올가 이모의 손을 꼭 잡고 끌 듯하며 거실을 나갔다. 둘은 저편 식탁에 한참 차려지고 있는 저녁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 그토록이나 오래 그리워하고 찾아 헤맸던 어머니와 자매를 그 뒤 두 번 다시 찾지 않았다…….



무슨 의무를 다하듯 그렇게 자신의 리투아니아 얘기를 마친 혜련은 얼마 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기셨다니 자주 뵐 수 있겠네요. 저도 내친 김에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아직은 잘 모르지만 대강 무대음악 쪽으로 해볼까 해요. 극단에 자리 잡게 되면 연락주세요.”



혜련이 늘 만나던 사람 헤어지듯 그렇게 말하고 제 전화번호를 일러주었다. 나도 당연한 듯 내 연락처를 알려주고 헤어졌지만, 저만치 인파 사이로 사라지는 혜련의 황갈색 머리칼을 보자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아이는 어떤 인연으로 나와 이렇게 만나게 되는 것일까. 서른네 해 길지도 않은 삶에서 벌써 세 번째 뜻 아니 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 구나. 그것도 당연한 듯이.’



그러나 리투아니아에서 온 그녀의 두 이모와 외할머니가 극적으로 연출해낸 그 광경이 아직도 강렬한 인상으로 내 의식을 사로잡고 있어서인지 오래 멈춰 서서 혜련을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하숙집으로 돌아와 다시 어둡고 구질구질한 일상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면서 한동안은 혜련을 찾아볼 생각조차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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