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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lobal] 투자은행 걷어차고 요리의 길로 … 영국에서 뜨는 한인 셰프, 주디 주

중앙일보 2010.09.11 00:27 주말섹션 12면 지면보기
영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요리사 주디 주(35). 그는 2000년대 초반 뉴욕의 월스트리트에 있는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의 트레이딩룸에서 근무했다. 미 컬럼비아대를 졸업한 뒤 치열한 경쟁을 뚫고 투자은행가로 일하다가 5년 후 돌연 사표를 던졌다. 그가 선택한 새로운 삶은 요리사. 돈 많이 버는, 잘나가는 직장을 걷어차고 유명 요리사로서의 발걸음을 내디딘 그를 7일 서울 삼성동 그랜드인터컨티넨털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11월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앞서 이들 20개국의 문화계 리더를 초청하는 C20 서울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모건스탠리서 5년 … 근데 요리책이 더 들어왔지요”

글=박현영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글로벌 경제 위기의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투자은행은 여전히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직장이다. 그런 매력적인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유가 먼저 궁금했다. “열심히 일했고, 잘 하기도 했지만 내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돈을 여기서 빼다 저기에 넣고, 그 돈을 다시 돌리고….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는 데 회의가 들고 도전 의식이 없어졌어요. 언젠가부터 열정은 사라지고 관성에 따라 일을 하고 있더군요. 고소득으로 인해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을 포기하지 못해, 타성에 젖어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글쎄 대부분 그렇게 살지 않나. 하나를 포기하고 다른 하나를 얻는 게 직업의 세계 아니던가.



“열정이 없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에요. 전 세계가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에 정작 나는 별 관심이 없었어요. 경제 잡지와 전문서적을 읽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내 눈에는 요리책과 음식에 관한 책들이 더 들어왔지요.”



그가 금융회사에 가게 된 것은 뉴욕의 대학에 다니면서 느낀 월스트리트의 생동감 때문이었다. 골드먼삭스, 모건스탠리에서 인턴을 하면서 봤던, 전시 상황 같은 트레이딩룸의 매력에 끌렸다.



“각자 앞에 모니터가 6대씩 놓여 있고, 헤드셋 두 개가 전화선 25개와 연결이 돼 있어요. 버튼 하나로 25개사의 고객과 통화하며 채권을 살 것인가 팔 것인가, 조언하고 상의하고 협상하고 순식간에 최종 결정까지 하죠. 사방에서 고함치고 지시하며 일하는 모습이 근사해 보였어요. 최고로 잘나가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많이 배울 수 있어 좋았지만, 그곳에서 파는 ‘상품’에 별 흥미가 없었던 거지요. 나는 한 인간으로서, 사회와, 그리고 세상과 좀 더 연결되기를 바랐어요.”



돈이 제공해주는 생활에 익숙해져 소득이 몇 분의 일로 줄어드는 것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직장 동료였던 남편이 “네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격려해줬다. 그 길로 뉴욕의 요리학교에 등록했다. 가장 어렵다는 제과·제빵 분야를 전공으로 택했다. 어려서 과학을 좋아했고,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그의 적성에 잘 맞았다. “요리는 과학이에요. 주방은 실험실과 비슷하죠. 산성과 알칼리성, 단백질의 구성, 열, 발효, 주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게 과학이지요.”



그런데 왜 하필 요리일까.



“요리는 나눔이에요. 가족과 친구와 함께 음식을 나누는 거 좋잖아요. 요리를 하는 것은 마음과 영혼을 따뜻하게 해주고 배를 채워주는 거지요. 그냥 즐거워요.”



‘아이언 셰프’의 주인공 4명. 왼쪽 둘째가 주디 주.
5월 초 영국 TV 채널4에서 요리 리얼리티 쇼 ‘아이언 셰프’가 방영됐다. 최고의 요리사 자리를 놓고 승부를 겨루는 쇼 프로그램이다. 그날의 음식재료는 게 살이었다. 일반인 도전자 네 명에 맞서는 ‘아이언 셰프’ 4명 중 하나인 주디 주는 전채요리로 ‘게 살을 넣은 김밥과 매콤한 게살장(Crab Kimbap With A Spicy Crab Dip)’을 만들었다. 서양에 알려진 ‘스시’가 아니라 ‘김밥’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식이란 걸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 프로그램은 1990년대 일본 후지TV가 ‘요리의 철인’이란 이름으로 시작해 인기를 얻은 뒤 미국과 영국으로 수출돼 리메이크됐다.



남편이 근무지를 옮기면서 런던으로 이사한 뒤 본격적으로 셰프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에게 제작진이 출연을 제의해 왔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요리사를 찾고 있었는데, 아시아계인 데다 여성인 점이 제작진의 눈에 띄었다. 함께 출연한 나머지 ‘아이언 셰프’는 영국인, 인도계, 러시아·라트비아계 혈통을 가진 남성들이었다. 주디의 출연은 아이언 셰프 역사상 여성으로선 두 번째다.



주디는 런던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명 요리사인 고든 램지의 주방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우연한 만남을 인연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고든 램지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셰프가 테이블마다 인사를 다니고 있었어요. 우리 테이블에 왔을 때 제 소개를 했더니, 이곳에서 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수석 요리사가 보는 데서 하루 종일 요리하는 면접을 통과해 2년 반 동안 일했어요.”



비교적 늦게 요리를 시작한 그가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에서 일자리를 얻은 것은 행운일까.



“음…이 바닥은 원래 그래요. 일자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아요. 쫓겨나지 않고 남는 게 어려운 거지요. 워낙 근무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에 이직률도 높거든요.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포기하고, 또 그 자리를 누군가가 메우고…일종의 회전문이에요. 아침 7시에 나와 새벽 1시에 들어가는 게 일상이니 육체적으로도 매우 힘들고, 온종일 고함치고, 욕먹으니 정신적으로도 아주 힘들어요.”



그는 지금은 레스토랑 주방에서 일하지 않는다. 글을 잘 쓰는 그에게 유명 요리사들이 요리책 공동 작업을 제안해 그 작업을 시작했고, 유명 레스토랑의 메뉴를 컨설팅하기도 한다. 잡지에 레스토랑 리뷰를 쓰기도 하고, TV 프로그램에서 요리 강좌도 한다.



“헤드 셰프가 되는 게 목표가 아니에요. 레스토랑의 주방은 ‘생산’에만 주력하지요. 헤드 셰프가 아닌 사람들은 창의성을 전혀 발휘할 수도 없고요. 그보다는 음식과 문화, 역사에 대해 학문적으로 더 연구하고 싶어요. 요리를 할 줄 알아야 음식 비평도, 요리책 작업도, 그리고 음식 문화 연구도 제대로 할 수 있지요.”



그는 “요리사로서의 훈련은 어려서부터 시작됐다”며 웃었다. 주디는 미국 뉴저지로 이민한 의사 아버지와 화학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만 해도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어서 모든 걸 집에서 만들어야 했어요. 김치도 담그고, 김도 참기름에 재서 구웠어요. 이런 작업은 모두 언니와 저의 몫이었어요. 아, 한국 음식이 정말 손 많이 가고, 시간 오래 걸리고…음식 해 먹는 게 정말 고된 작업이었어요. 언니와 나는 만두 1000개를 빚기도 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멸치 머리를 떼고, 콩나물 뿌리를 다듬고…거의 아동 노동 착취 수준이었다니까요, 하하.”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한식 세계화에 대한 조언도 했다.



“너무 정통 한식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한국의 맛을 일단 느끼게 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외국에선 어차피 정통 재료도 구하기 힘들거든요. 외국인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익숙한 재료부터 시작해야 하고, 조리법을 단순화해야 해요. 잡채 재료를 일일이 따로 볶는 게 아니라 한데서 볶고 끝내야죠. 4시간씩 요리에 매달릴 수도 없고, 그렇게 복잡하면 안 해먹게 되잖아요. 한 가지라도 한국적인 재료를 쓰는 게 첫걸음이에요. 영국의 정통 디저트에 ‘레몬 파싯’이 있는데, 저는 유자를 넣어 ‘유자 파싯’을 만들어 봤어요. 한국 재료라는 걸 대놓고 알리지 않아도, 맛있으면 손님이 먼저 묻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외국의 요리사들을 한국으로 초대해 다양한 재료와 양념을 맛보게 하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제가 아는 프랑스인 셰프는 최근 일본에 다녀온 뒤 ‘다시 국물’을 프랑스 요리의 밑국물로 쓰기 시작했어요.”






j칵테일 >> 투자은행-주방의 공통점



투자은행의 트레이딩룸과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의 주방을 모두 경험해 본 주디 주는 흥미롭게도 두 세계가 많은 공통점을 가졌다고 말한다.



둘 다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계다



금융계도 그리고 요리계도 아직은 남성들이 수적으로 우세하다. 그래서인지 분위기도 거칠다. 주디 주는 “테스토스테론(성적 욕망과 근육 발달에 관여하는 호르몬)이 넘치는 경기장” 같다고 표현했다.



스트레스 강도가 높고 업무 속도는 매우 빠르다



‘생큐’나 ‘플리즈’ 같은 단어는 들을 수 없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각종 소음, 고함치고 욕하는 소리가 가득해요. 지시가 떨어지면 즉각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저도 트레이딩룸에서 일할 때는 입이 거칠어져 욕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둘 다 계급사회다



투자은행에 애널리스트와 중간 간부, 부사장, 수석 부사장, 사장이 있듯 주방의 규율도 엄격하다. 재료 손질과 설거지 등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말단 주방 보조부터 헤드 셰프까지 층층시하다.



빠른 시간 안에 실수 없이 처리해야 한다



“집중력을 높여 주문 사항을 숙지하고, 즉각 실시해 실수 없이 배달해야 해요. 실수는 용납 안 되죠.” 정해진 마감시간이 있다는 것도 둘의 공통점.



>> 다른 점



셰프가 주문지를 읽으면 주방에서는 “예스, 셰프!”를 외친다. 트레이딩룸에선 최고 책임자의 지시보다는 자신의 고객과의 관계가 우선이다.



주디 주는 “투자은행은 돈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만, 주방은 열정이 우세한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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