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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2-2

중앙일보 2010.09.11 00:21 주말섹션 10면 지면보기
일러스트: 백두리 baekduri@naver.com
“그럼 리투아니아에 남겨졌다는 두 이모도 모두 미국으로 건너왔단 말이야?”


“올가, 우리도 가자 … 엄마를 찾아”

내가 다시 혜련의 얘기에 빨려 들며 그렇게 묻자 그녀가 별 감동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미국으로 돌아간 제가 막 하이스쿨에 입학했을 때요.”



“그렇다면 70년대 말쯤이고, 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그들을 버리고 떠난 지는 30년이 훨씬 넘었을 때잖아? 그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토록 먼 길을 찾아왔다는 말이야?”



나는 그 몇 해 전에 있었던 KBS방송의 이산가족 찾기가 분단 30년 만의 일인데도 눈물바다를 이루며 몇 날 몇 달이나 이어졌던 것을 까맣게 잊고 그렇게 물었다.



“한국에서도 그 무렵에 이산가족 찾기 운동인가 뭔가 하며 난리 쳤잖아요? 마침 방학 때라 나도 한국에서 그 방송 봤는데, 전쟁고아인 아버지는 아예 텔레비전에 붙어 있고….”



“그건 한국전쟁이란 큰 전쟁 중에 대규모로 일어난 것이고, 너희 외가 경우는 좀 다르잖아? 게다가 네 이모들은 그때 겨우 아홉 살, 세 살이었다면서? 둘 모두 외할머니나 어머니의 얼굴조차 잊어버렸을 때인데.”



그제야 나도 그 방송을 떠올리고 까닭 모르게 솟구치는 짜증을 누르며 그렇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때 이미 가망 없다는 선고를 받고 퇴원해 있던 아버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날부터 엊그제 흥남부두에서 철수한 ‘38따라지’ ‘국제시장 나그네’의 정서로 돌아간 아버지는 때늦은 후회와 눈물로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을 헛되이 소진한 탓인지, 결국 그해를 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 내 속을 알 리 없는 혜련이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받았다.



“그들이 리투아니아에서 출발한 것은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떠나고 6년 뒤였대요. 그러나 북유럽을 가로질러 남독일로 가고 거기서 다시 프랑스로 내려가 정착했다가 미국으로 건너오는 데 20년이 걸리고, 미국에서 다시 우리를 찾아오는 데 몇 년 더 걸리는 식으로 30여 년이 흘러간 거죠.”



“서양 사람들에게도 그토록 대단한 가족 관념이 있다는 게 놀라운데.”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좀 그런 데가 있어요. 하지만 그보다는 이모들의 개성이죠. 아니, 한국 사람들 식으로 말하면 어린 나이에 안게 된 한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모들이 서로 손을 꼭 잡고 리투아니아를 떠날 때는 겨우 아홉 살과 열다섯 살의 자매였는데,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찾아왔을 때는 40대 50대의 중년 부인들이었어요. 그런데 그때까지도 어디를 가든 이모들은 서로 손을 꼭 잡고 계시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녀는 그 이모들 얘기를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들려주었다.



대를 이어 그 집 영지를 돌봐 왔다는 늙은 농부 집에 맡겨진 혜련의 큰 이모 에레나와 막내 이모 올가는 리투아니아가 소비에트 연방이 되고 모든 사유(私有)가 철폐되면서 애매한 신분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 노부부에게 에레나와 올가는 이제 더는 대를 이은 상전의 자손도 아니고, 적잖은 지대(地代)를 절약하게 해줄 지주의 딸들도 아닌 더부살이 군식구에 지나지 않았다. 대전(大戰) 뒤의 일반적인 궁핍 때문에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사회주의 배급제도 아래서 6순의 부부가 어린 외손녀 하나와 에레나 자매를 함께 거두기가 쉽지 않았다. 부부 모두 심성이 착해 기꺼이 그 짐을 떠맡으려고는 했지만 능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3년 뒤에 할아범 쪽이 먼저 죽고 다시 이태 뒤에 할머니마저 숨지자, 그나마도 돌봐줄 이가 없었다. 그 허물어지다만 고성 한 모퉁이의 오두막에 남게 된 것은 열다섯 살 에레나와 동갑인 그들의 외손녀 소냐, 그리고 아홉 살 난 올가뿐이었다. 착한 소냐는 그 뒤로도 에레나 자매와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나, 에레나는 여러 해 마음속으로 별러 오던 결단을 내렸다.



“올가, 우리도 가자. 엄마를 찾아. 아니, 이제는 우리가 떠나야 돼. 아니면 영영 엄마를 만나볼 수 없을 거야.”



“엄마?”



이미 기억 속에 까맣게 지워진 어머니를 떠올려보려고 애쓰며 올가가 물었다.



“그래. 엄마. 우리 어머니. 엄마가 떠날 때 내게 여기서 너와 함께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라고 했지만 나는 알아.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 또 어머니는 말했지. 아버지와 함께 기다리면 어머니도 우리를 데리러 돌아올 거라고. 하지만 그게 벌써 언제야? 아마 어머니도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어머니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라도 찾아가 봐야지. 반드시 살아서 어머니를 만나봐야 해. 꼭 묻고 싶은 게 있어.”



그런 에레나의 표정에는 그리움이나 슬픔보다는 결연한 의지 같은 것이 앞서 보였으나 어린 올가는 그게 이상한지조차 모르고 언니를 따라나섰다.



그들 자매가 길을 떠난 것도 그들의 어머니와 또 다른 자매가 6년 전에 떠날 때처럼 길 가기 좋은 5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여행은 출발부터가 그 어머니와는 달랐다. 어머니는 빌뉴스에서 폴란드 동북부의 작은 도시까지 기차로 단숨에 달려갈 수 있었으나, 그들 자매는 리투아니아 서남부의 옛 영지 부근에서 걸어서 국경을 넘어 폴란드를 가로질러야 했다.



떠날 때의 몇 푼 노자를 밑천 삼아 폴란드의 삼림지대와 초원을 지난 자매는 다시 구걸과 노숙으로 비옥한 평원지대를 헤쳐 나갔다. 때로 양배추밭에서 버려진 양배추를 씹기도 하고, 수확이 끝난 감자밭에서 새끼 감자를 얻어 삶거나 설익은 밀을 손바닥으로 비벼 씹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듬해 열여섯이 된 에레나는 품을 팔아 여비를 벌기도 했지만 그 행로는 험난하다 못해 가혹하기까지 했다.



한번 임신을 경험하기도 하고 서쪽 국경지대의 홀아비 소농 집에서는 몇 달 살아주기도 하면서 마침내 독일로 넘어간 자매가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을 따라 바이에른 부근에 이르렀을 때는 리투아니아를 떠난 지 3년이 다 돼 갈 때였다. 하지만 그 괴롭고 먼 길을 가는 동안에도 에레나는 한번도 어린 올가의 손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 사이 열두 살이 된 올가가 어쩌다 손을 빼내려 하면 에레나는 한 서린 표정으로 되뇌었다.



“엄마는 어떤 경우에도 네 손을 놓지 말라 하셨어. 한순간도 네게서 눈을 떼지 말고 돌보라 하셨어. 내가 엄마를 다시 만나려면.”



하지만 그 3년의 피로 때문이었을까, 남독일에서 멈춰선 에레나의 발걸음은 좀체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는 벌써 대전이 끝난 지 10년에 가까워 완전히 회복된 모젤 지방의 포도밭에서 일하면서 다시 3년을 보냈다. 아직 어린 대로 언니와 함께 포도밭에서 일하게 된 올가는 언니가 엄마 찾기를 단념한 줄 알았다. 특히 에레나가 거기서 만난 프랑스 청년을 따라 보르도로 가서 결혼까지 했을 때는 누가 봐도 그대로 퍼질러 앉는 것 같았다.



“아니야. 너는 여기서 결혼해서는 안 돼. 만약 내가 못 가게 되면 너라도 미국으로 가야 돼. 가서 꼭 어머니를 만나야 돼.”



보르도에서 다시 몇 년 보내는 동안 어느새 아가씨로 자란 올가가 마을 청년과 사랑에 빠졌을 때 에레나가 나무라며 말렸다. 그러다가 몇 년 뒤 포도주 대회에 나갔던 프랑스인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장례 치르기 바쁘게 올가를 불러 말했다.



“떠날 준비를 해. 이제 떠날 때가 되었어. 비행기 표를 구하는 대로 미국으로 떠날 거야. 우리는 반드시 그리로 가 엄마를 만나야 돼”



그때 또 다른 프랑스 청년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한 올가가 나서 처음으로 언니에게 항의했다.



“언니, 벌써 20년이야. 엄마가 떠난 지 20년이라고. 언니는 미국, 미국 하지만 엄마가 그 넓은 미국 천지 어디에 있는지 알아? 또 어렵게 찾아간다 한들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벌써 우리 삶도 절반 가까이 살았고, 엄마는 이미 50이 훨씬 넘은 노인이야. 엄마를 만난다는 게 그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매달릴 만한 일일까?”



“충분히. 나는 엄마를 만나 꼭 물어봐야 할 일이 있어. 너도 그것은 꼭 알아야 할 거야. 우리 둘 모두 엄마에게 물어야 할 일이 있어. 시카고로 가자. 기억나. 엄마는 시카고로 갈 거라 했어. 거기에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성공한 아버지 친구도 있다고 했어.”



하지만 올가가 말한 것처럼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자매가 어머니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70년대에 접어든 그때는 이미 어느 지역에 어느 나라 출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산다는 식의 거주 개념은 사라져 가고 있었고, 그것은 시카고도 마찬가지였다. 자매는 도시 구석구석을 뒤지듯 리투아니아 사람들을 찾으며 어머니의 자취를 찾았으나 영 찾을 길이 없었다. 아버지 친구였다는 사람도 그때는 전설이 되어 있었을 뿐, 그가 어디로 옮겨 앉아 어떻게 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거기까지 들은 내가 불쑥 물었다.



“그럼, 너희 가족을 찾는 데 미국까지 온 이모들이 다시 10년 가까이나 걸렸단 말이야?”



“그것도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다섯 개의 큰 신문에 매년 한 차례씩 3년이나 연거푸 사람 찾는 광고를 낸 뒤에야 만나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 이모들이 그렇게 어머니를 찾아 묻고 싶은 건 뭐였대? 무엇이 반평생을 걸고 물어봐야 했을 만큼 중요한 거였대?”



“바로 선생님이 조금 전 외할머니와 엄마가 리투아니아를 떠나는 얘기를 듣자마자 물어보신 것….”



혜련이 그래 놓고 어이없을 때 잘 그러는 것처럼 쿡쿡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날,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데, 참 이상했어요. 외할머니는 헤어진 지 3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 두 딸을 기다리는 사람 같지 않게 차분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무슨 결판을 기다리는 사람 같은 표정까지 있었어요. 어머니도 겉으로는 집안을 꾸민다, 음식을 장만한다, 오래 헤어져 있던 자매를 만나게 된 사람의 반가움과 기쁨을 꾸미고 있어도 왠지 불안하게 서성거리는 빛이 엿보였어요.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먼 길을 돌아 찾아온 두 분 이모님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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