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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의 차이니즈 리더십] 장쩌민의 타협의 리더십

중앙일보 2010.09.11 00:02 주말섹션 12면 지면보기
1989년 5월 63세의 상하이 당서기 장쩌민(江澤民)은 덩샤오핑(鄧小平)한테 1인자 자리를 통보받는다. 하지만 명색이 당 총서기였지 권력의 정상에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정부는 리펑(李鵬) 총리가 꾸려가고 있었고, 양상쿤(楊尙昆)-양바이빙(楊白氷) 형제가 장악한 군은 멋대로 행동했다. ‘제2의 화궈펑(華國鋒)’이란 수군거림이 들렸다. 자오쯔양(趙紫陽)의 실각으로 생긴 공백을 잠시 메울 허수아비로 여겨졌다. 그러나 장은 무려 13년이나 권좌를 지켰다. 중국을 세계로 발돋움시킨 제3세대 리더라는 찬사도 들었다. 장쩌민은 과연 어떤 리더십을 발휘한 것일까.


이상 - 현실 어긋날 때
이념 - 실천 충돌할 때
장쩌민은 ‘타협’ 택했다

장쩌민이 처음 중난하이(中南海)에 입성했을 때 그에겐 ‘화분’이란 별명이 붙었다. 주중 미국대사를 지낸 제임스 릴리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움직일 줄은 모른다”는 뜻으로 설명했다. ‘장식용’이라는 말이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덩샤오핑이 사망하면 장쩌민은 리펑의 먹이가 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이런 예측이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당시 장쩌민은 1인자가 될 야심도, 또 준비도 전혀 돼 있지 않았다. 왕다오한(汪道涵)의 눈에 들어 상하이 당서기까지 되긴 했지만, 부총리 인선에서 이미 두 차례나 물먹은 터였다. 그가 눈독을 들인 자리는 모교인 상하이교통대학(上海交通大學)이었다. 교수가 되기 위해선 저서는 없더라도 번역서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장은 모스크바 유학 시절 알게 된 스승의 책을 번역해 출판하는 작업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



하지만 당 총서기 자리는 그의 마지막 승부욕을 일깨웠다. 무엇보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베이징 정국에서 살아남는 게 먼저였다. 자신의 국정철학을 펼치는 건 그 다음이었다. 생존을 위해 장이 선택한 건 ‘타협’이었다. 바로 이 ‘타협의 리더십’은 장의 13년 중국 지배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장은 우선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힘을 가진 원로들의 마음을 사야 했다. 한데 문제는 개혁의 속도를 둘러싸고 원로들 진영이 갈려 있다는 점이었다. 1인자 덩샤오핑이 과감한 개혁을 주장하는 반면, 천윈(陳雲)은 ‘새(시장조절)는 새장(계획경제) 안에서만 날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은 두 원로그룹 사이를 오갔다. 천안문 사태 직후 보수파의 목소리가 높을 때는 천윈의 편에, 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가 발표돼 개혁파가 힘을 받을 때는 재빨리 덩의 편에 섰다. 그런 장에게 바람 따라 나부끼는 ‘풍향계’라는 야유가 나왔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이 어긋나고 이념과 실천이 충돌할 때 지도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장은 타협이라고 봤다. 그래서 보수세력이 고개를 들 때엔 노선을 말하고 정치를 이야기했으며, 개혁세력이 부풀어 오를 땐 경제를 논하며 개혁을 설파했다. 타협만이 당의 분열을 막고 자신의 지위를 지킬 수 있는 비방(秘方)이라고 본 것이다. 사실 그가 당 총서기로 전격 발탁된 배경 또한 그의 탁월한 타협 능력이 인정받은 결과였다. 86년 상하이 학생운동을 그는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전문을 원문으로 암송하는 것으로 무마시켰다. 89년 천안문 사태 때는 직접 메가폰을 들고 농성 중인 학생들을 설득해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상하이 시위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시위대와 진압군 양쪽을 오가며 타협을 이끌어낸 그의 리더십은 사실 어느 한쪽도 속 시원하게 만족시킬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극단의 충돌만큼은 피하게 했던 것이다.



베이징에 올라온 장쩌민으로선 동료들과의 타협 또한 절실했다. 말이 동료지 어제까지 상사였던 이가 대부분이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양자인 리펑 총리는 장의 자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치안과 기율을 담당하는 차오스(喬石)의 경우 상하이 지하공작 시절부터 장의 2년 선배이기도 했다. 그래서 장은 주요한 연설의 경우 그 내용을 미리 동료들에게 돌려 의견을 구하는 절충의 방법을 택했다. 또 군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방에서 거울을 보며 군인처럼 절도 있는 걸음걸이를 연습했다. 복장에서도 타협의 철학을 구현했다. 그는 부대 시찰 시 군복 티가 나는 황록색의 인민복을 입었다. 군 출신이 아니기에 군복을 입는 건 주제 넘게 비칠 수 있었고, 그렇다고 양복을 입는 건 분위기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왼쪽)과 장쩌민.[중앙포토]
장쩌민의 타협의 리더십이 가장 빛을 발한 건 92년 14차 당 대회와 97년 15차 당 대회에서였다. 78년 개혁·개방 정책 채택 이후 늘 부딪쳐 왔던 보수파와 개혁파 간의 갈등을 타협의 리더십으로 극복하며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을 잇는 제3세대의 진정한 리더로 부상했다. 그의 전임자들인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 모두 보혁(保革) 갈등 속에서 퇴장해야 하지 않았던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중국의 리더로서 중요한 건 정책이나 노선의 변화를 반드시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합리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장은 14차 당 대회에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사회주의를 골간으로 유지하되 경제운용엔 자본주의 요소 도입)’를 제창했다. 보수파를 달래기 위한 사회주의와 개혁파의 손을 들어주는 시장경제 간의 타협인 것이다. 또 97년엔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중국의 사회주의는 초급단계에 처해 있어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기 위해선 자본주의 요소 도입이 필요하다는 논리, 당시 국유기업 개혁을 위해 자본주의 요소인 주식제 도입이 필요했다)을 역설했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은 사실 실각한 자오쯔양의 낡은 외투에서 꺼내온 것이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나 사회주의 초급단계론 등은 서방엔 모순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장쩌민에겐 상호 보완적인 것이었다.



외교에서도 타협의 리더십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99년 5월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군이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대사관을 오폭(誤爆)했다. 나토군이 발사한 9만 발의 폭탄과 미사일 중 엉뚱한 곳에 떨어진 건 불과 7발이었는데 이 중 5발이 중국대사관에 떨어져 3명의 사망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낸 것이다. 들끓는 중국 민심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특히 시위대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학생들이 가두행진에 나설 때 일반 시민이 가세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고, 시위 자체를 불허하면 약골 정부로 십자포화를 맞을 게 뻔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장은 베이징의 미국대사관으로 항의하러 가는 학생 시위대에 버스를 제공하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학생들을 버스에 태워 미국대사관 앞에 내려놓으면 시위를 적절한 수준으로 통제할 수 있어 시위 효과와 통제 효과를 동시에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을 상대로 하는 이 같은 장의 전략은 ‘투이불파(鬪而不破)’의 타협에 다름 아니다. 싸우되 그 관계를 완전히 깨뜨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장은 2002년 11월 당 총서기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이양할 때도 타협을 선택했다. 덩샤오핑에 의해 낙점된 후진타오에게 권력을 넘겨주기는 했지만 자신의 상하이방(上海幇) 인맥을 다섯 명이나 정치국 상무위원에 밀어넣은 것이다. 후진타오가 이끄는 4세대 집단지도부의 정치국 상무위원은 모두 9명으로 구성돼 중대 사안에 대해 표결할 경우 이기게 되는 형국이다.



장쩌민은 강력한 카리스마형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천안문 사태의 비극 이후 중국이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사회적 긴장은 고조됐으며 국제적으로는 고립된 시기에 이룬 그의 업적은 다른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j칵테일 >> ‘3다(三多) 주석’



베이징 외교가에선 한때 장쩌민을 ‘3다(三多) 주석’으로 일컫기도 했다. 말이 많은 수다쟁이고, 영어를 많이 하며, 노래도 많이 한다는 것이다. 각국 외국 정상과의 만남에서 장쩌민이 한 곡 뽑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먼저 한 곡을 멋지게 뽑은 장은 그다지 노래를 잘하지 못하는 김 대통령에게도 기어이 노래를 부르게 했을 정도다. 장은 왜 노래하는 것일까. 자신이 황제가 아닌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그는 또 외빈을 만날 때 미국과 일본에서 온 손님만큼은 자신이 직접 만나야 된다고 고집을 피웠다는 우스개 이야기도 있다. 미국 사람은 자신이 영어를 잘하기 때문이고, 일본 사람은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 주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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